[소설] 낮게 나는 비행기 下

by 소진

그건 됐으니까 이것 좀 해주세요.


나는 파일을 건네받는다. 같은 인턴인 최황규씨는 뭔가 본격적인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백날 자료정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무보조가 될 걸 그랬다. 사진전에서 대상을 받은 마케팅부 인턴 최황규씨는 항상 열심히 일한다. 사실 나는 대상 사진 구석에 앉아서 반쯤 멍하고 반쯤 억울한 미소를 짓고 있다. 최황규씨는 그런 내가 잘 보이지 않도록 포토샵으로 그림자효과를 넣었을 것이다. 사진 속 내 얼굴은 흐릿하고 검었다. 최황규씨는 명실상부 정규직 전환자다. 뽑힌 인턴 중 정규직 전환자는 한명이다. 최황규씨는 부장님을 개처럼 따르며, 담배타임도 매일 가졌다. 이십분씩 일찍 출근해서 사무실을 쓸고 닦는다. 모두 알지만 굳이 하지 않는 짓을 모두 한다. 부장님은 최황규씨를 눈에 띄게 편애한다. 나도 그 편이 편하고 좋다. 최황규씨는 늘 온 몸에 힘이 들어가 있다. 타자를 칠 때도 딱딱딱하고 거칠고 힘차게 친다. 나의 남성 이상형은 단단하고 남자다운 사람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황규씨는 내 이상형은 아니다. 최황규씨는 잘못한 사람을 포용하는 쪽이 아니다. 귀싸대기를 치는 타입이다. 나를 쫒아낸 스터디 모임 팀장 같은 사람. 나는 잘못을 많이 저지르며 산다. 그래서 누구에게 잘못해야 벌 받지 않는지 귀신같이 안다. 최황규씨에게는 언제나 완벽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최황규씨는 기필코 내가 잘못한 짓을 찾아내서 모두에게 알려준다. 인턴 기간이 끝나는 시점부터는 나를 아예 모른 체하고 있다. 내가 장려상을 받았을 때 조금 놀란 듯했지만, 내 사진을 칭찬해주었다. 그건 최황규씨가 보기에도 내 사진이 형편없다는 뜻이다.


놀랍게도, 나는 최황규씨를 마음 속 깊이 좋아하고 있다. 그건 성적인 의미가 아니다. 순수한 호의다. 우리는 매일 아침 딱딱한 인사 한번, 즐거운 점심식사하세요 인사 두 번, 이만 가보겠습니다 인사 세 번을 나누는 누가 봐도 안 친한 사이다. 하지만 나는 최황규씨 같은 타입의 사람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친해지고 싶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타입의 사람이 있지 않은가. 나에게는 최황규씨가 그런 사람이다. 무언가 그토록 열성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는 최황규씨가 아직 순수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그런 순수한 열정 따위 없다. 그리고 나는 나를 싫어한다는 점에서도 최황규씨와 동지의식을 느낀다. 나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좋다. 반대로 날 좋아하는 사람은 싫다. 좀 더 본격적으로 싫기 때문에 싫어할만한 이유도 친히 만들어준다.


나는 어른이다. 스물여섯이니까, 본격적 어른은 아니라도 슬슬 어른정도는 맞다. 내 생각에 본격적 어른은 서른 이후다. 스무 살에 혼자서 밥 먹는 법을 배웠다. 스물한 살, 술에 취해도 제정신인 척 할 수 있게 되었다. 스물 둘엔 곤란한 일을 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스물 셋 부모님 집에서 나와 혼자 살기 시작했다. 스물넷이 되자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스물다섯 핸드폰 비를 스스로 냈다.


스물 여섯, 사대보험에 가입되어버렸다. 세금을 내버렸다. 나라에게 돈을 착취당했다. 회사에게 정신건강을 빼앗겼다. 윗사람의 말을 흘려들은 후 웃긴 생각을 급히 떠올려 큰 소리로 박장대소할 수 있다. 만원이 그렇게 큰돈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가장 큰 변화는 누구누구씨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최황규씨는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다가오는 부장님을 차마 피하지 못하고 맞장구치지만, 최황규씨는 제 발로 다가가 개그를 친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절박하게 만들었을까.


황규씨, 바쁘세요?


네.


이것 좀 도와주세요.


뭡니까?


이거요. 황규씨 여자친구 있죠?


네.


이 회사 사람이에요?


네?


인사부에서 일해요?


최황규씨가 그제야 날 쳐다봤다. 나는 아마도 반쯤 멍하고 반쯤 억울한 미소를 지었겠지. 원래 적은 가까이에 있다. 나는 그의 군인 시절을 봤다.


그 사람도 여자였고, 전 직장 멘토였다. 운이 좋았다. 그녀는 날 많이 챙겨줬다. 나보다 겨우 한 살이 많았는데, 나는 일부러 일이 어려운 척했다. 그러다 내 생일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내 생일 다음날 우리는 개인적으로 만났다. 함께 술을 마시다, 생일 이야기가 나왔다. 어제가 바로 내 생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더니 갑자기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핸드폰과 가방도 놔두고 지갑만 들고 나갔다.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케이크가 들려있었다. 우리는 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나는 소원을 빌고, 불을 껐다.


그녀가 내 생일을 챙겨줬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아주 어려서 한 번, 그 이후로 나는 생일을 축하받은 적이 거의 없다. 다 세어보아도 다섯 번 정도. 따로 생일 파티를 열지도 않았다. 내 생일은 팔월이라 학창 시절 때는 방학이었다. 스물이 넘어서는 친구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잘 모르겠다. 나이가 들고 생일을 축하받으면 나는 자꾸만 서러워졌다. 우는 수준의 서러움이면 대충 수습하고 넘어갈 수 있을 텐데. 그냥 기운이 빠지고 표정이 어두워져서 도무지 괜찮은 척할 수 없어졌다. 그래서 그날 우리는 우울하게 헤어졌다. 그녀는 자꾸만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날이 회사 생활 마지막 날이었다. 그 후로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마지막 출근 날, 마케팅부는 단체로 점심식사를 했다. 나를 위한 송별회 겸 최황규 사원 환영회였다. 나의 존재감은 흐릿하기 때문에 환영회의 분위기가 강했다. 그래도 저녁에 굳이 모아서 회식을 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물론 나는 참가하지 않고 몰래 빠져나갔을 것이다. 모두 예상했던 대로 최황규씨는 계속 남아 일하게 되었다. 짐은 일주일 전부터 조금씩 챙겨갔기 때문에 떠날 때는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나갈 수 있는 줄 알았지만, 대리가 부르더니 일층 창고에서 액자를 받아가라고 말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혹시 나중에 전화해서 찾아가라고 할지도 모른다. 어쩌피 퇴사 할 거 사진을 보내지 말고 버틸 걸 그랬다. 액자는 보기보다 들었을 때 더 크고 무거웠다. 나는 그 흉물스러운 사진을 들고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몇 분 더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 버릴까 생각했지만, 그 흉물스러운 사진에는 내 이름도 함께 프린트 되어있었다. 치밀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큰 액자가 하나 달리게 되었다. 짧은 인턴 생활을 지낸 기념품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계속 보니 곤충 껍데기도 귀여운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던 때가 있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두 번 단체 미팅을 했다. 그 중에 한 번은 개인적으로 다시 만났었는데, 잘 되지 않았다. 그 후로도 그랬다. 그게 내 성적인 취향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나는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지, 남자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아무도 안 좋아하거나, 둘 다 좋아하는 지 생각했다. 나는 한 번도 누가 미칠 듯이 좋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러 번 좋아하거나, 시선이 가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게 사랑이 맞다고 확신이 들지 않았다. 사랑은 더 거창하고 엄청난 것이라고 믿었다. 겨우 이정도 마음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좋아하는 거지, 금방 포기가능한 정도. 누가 좋고, 그리고 다시 누가 좋아야 그렇게 몇 번 반복되어야 내 성적 정체성에 확신이 드는데. 그 과정에서 나는 나도 알 수 없는 법칙으로 성별 나이 막론하고 누가 좋아졌으니까. 나의 마음은, 선생님을 존경하는 것, 아이를 귀여워하는 것, 친구를 좋아하는 것, 전혀 모르는 타인의 외모를 좋아하는 것. 그 모든 게 동일한 크기였다. 그렇게 치면 나는 양성애자. 범성애자. 하지만 그렇다면 왜 누구와도 사귀지 않고 있는 걸까? 그래서 다시 무성애자. 결국은 어떤 선택도 하지 않은 채로 무엇도 아닌 그냥 애자(愛子)로 남아있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일기] 2022년 3월 22일 17시 3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