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쩍 돌연히 눈물이 잦은 편입니다. 아들의 점점 벌어지는 어깨와 이마의 울긋불긋 활짝 핀 여드름을 보노라면, 앙 깨물어주고픈 초절정 귀여움은 온데간데 도대체 어디 갔냐며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절로 나오고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남편은 자꾸 나한테 올가미 2024년 버전 찍냐고 하는데, 좋아하는 마음을 다 표현하지 말고 적당한 거리를 두라는 거, 비단 연애할 때만 해당되지 않겠죠.
부모와 자식 관계도 마찬가지일 거 같습니다. 건강한 거리감과 긴장감이 필요합니다. 맞습니다. 아이는 커가고 나는 늙어가고 이로서 점점 부모에게 떨어져 나가는 중이겠죠. 기분이 좋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지만 슬프고 애닯기도 합니다. 난 사실 곽윤정의 <아들의 뇌>를 보고 결심한 게 하나 있습니다. 이 제법 두꺼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아들의 뇌에 대한 이해심’인데요.
아들의 뇌량이 가늘고 길기 때문에 좌뇌와 우뇌 간의 정보 교환이 빠르지 않은 데다가 많은 양이 오고가지를 못하기에 엄마의 말이 길어지면 청각적인 자극을 다루는 데 서툴다고요. 그래서 아들의 뇌는 이야기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 빠져있거나 딴청을 피우기 마련이니 서운해도 부모는 너그럽게 아량을 베풀고 어쩔 수 없이 이해해야 한다고요.
이 책을 본 후부터 가급적이면 잔소리를 줄이고 하고픈 말을 적어보곤 합니다. 나중에 메모를 출장정산용 영수증 모으듯 차곡차곡 모아, 아들에게 하고픈 말로 책 한권을 꼭 내보리라 다짐한지 언 2년째 되었습니다. 입은 꾹 닫고 그 대신 분주하게 지금 이 글을 쓰는 오늘도 다다닥 거리는 컴퓨터 자판 소리가 거실을 채우네요.
기시미 이치로의 <마흔에게>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옵니다. 책을 써서 사람들에게 하고픈 말을 전할 수 있고, 어떤 상태에도 타자에게 공헌할 수 있으니 그리고 책은 남을 테니까 결국 쓰라고요. <굶주린 마흔의 생존 독서>를 출간하고 북토크를 갈 때마다 책을 쓰고 싶어하는 독자들이 주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 남길 수 있어서, 자식이나 손주들에게 물려줄 수 있어서...
근데 말이죠. 죽으면 땡인데 뭘 그렇게 남기고 싶어할까를 생각해봤습니다. 도대체 뭔 미련이 남을까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공감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미련하게 뭘 기대하냐고요? 그 누구도 우리의 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 모르는 바는 아니죠. 결국 본인들의 갇혀진 세계 안에서 그 말들을 소화하고 해석하면 그뿐이니까요.
난 인정욕구나 기대보단, 말을 삼키고 쓰는 그 시간만큼은 침묵하고 내가 하려는 생각을 다시 곱씹어볼 수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합니다. 즉 일단 쓰기의 시간을 벌고 그걸 십분 이용하는 거죠. 그 다음 부산물이 결국 글이나 책인거죠. “말을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몇 년이면 충분하지만 침묵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평생이 걸린다.” 이 기막힌 말을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했다지요? 특히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에겐 말이죠. 가시돋친 말보다 새기는 글로 입 꾹 침묵으로 사춘기의 강을 건너야지 별 수 있겠는지요. 우리가 건너는 그 강이 부디 요단강이 아니길 바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