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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한다 Apr 28. 2022

읽기, 글쓰기 사이

독서사색


‘말하기’ 하면 떠오르는 그녀, 참 밝고 수다스러웠다. 그녀의 말하기에 언제나 특색이 있는데, 본인이 주어가 아니다. 온통 남의 이야기. 내가 궁금해하지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던 걸 듣다 보면 항상 드는 생각, 난 왜 여기에 있나. 아직까지 그녀가 주어 없는 말을 하고 사는지 가끔 궁금하다.


듣는 내 시간도 아깝지만, 그녀의 시간과 에너지도 마찬가지. 남에게 온종일 집중하면 무엇보다 내 자신을 들여다볼 시간이 통 없다. 주로 자신의 발전 가능성은 나 몰라라 될 수 밖에 없거든. 가만 보자. 독서는 말이 아닌 작가의 글을 통해 사상을 들여다보는 거 아닌가. 그래서 남의 글 ‘읽기’를 통한 앎으로만 끝낼 수는 없어 시작했다. 독서 후 ‘주어 있는 글쓰기’,


일년에 150권씩 다독하면서 지금껏 20권 가까이 책 쓴 정신과 의사 하지현 작가와 비교 따위가 되겠냐만은 나는야 최대한의 나를 꿈꾸고 희망하기 위해 독서하고 글을 쓰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는 글쓰기를 튀김으로 비유했는데, 작가 은유는 부엌에서 튀김을 올리는 마음으로 꾸준히 글을 쓰라고 했다.


왜 일단 입속에 넣으면 그 바삭거리는 튀김옷에서 뚫고 나오는 풍부하고 짙은 향미는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아마도 각성 상태로 읽고 쓰는데 단련된 능력으로부터가 아닐까 싶다. ‘각성’의 사전적 의미는 깨어 정신을 차리거나 깨달아 앎을 말한다. 이렇게 쓰는 글은 나를 돌아보는 비춰보는 자아성찰 과정 속에서 나오는 크고 작은 결과물일 테고


‘도대체 쓰긴 뭘 써?’ 물론 자문자답할 때도 있다. 읽은 게 많지 않다고 경험한 게 별로 없다고 투덜거린다. 글쎄 주어 있는 글쓰기가 그렇게 어려울까. 베스트셀러인 글배우의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했다>에 무슨 그리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내용이 있었나.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자판기의 음료와 같다. 신문이든 책이든 읽기란 버튼을 누르면 글쓰기란 음료가 나오는 것. 예전부터 강준만 선생님의 막힘없는 글쓰기를 훔치고 싶었다. 그의 글은 마치 내가 좋아하는 닥터페퍼 같다. 알싸한 계피맛이 나고 달콤하며 톡 쏘는 시원함도 있다.


물론  매력적인 향미에는 읽고 쓸 때의 고독과 절규와 희열도 함께 녹아져 있을 거다. 부디 목구멍을 타고 꿀떡꿀떡 넘어가는 닥터페퍼 같은 책을 죽기 전에  써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질이고 양이고 따질 겨를이 어디 있나.


연암 박지원의 말에 강한 동력을 얻어본다. “ 중요한 것은 자신의 글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다. 본인이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것을 곡진히 드러내야 한다. 문자의 도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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