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그림자와 마주하기: 방어기제
네가 남을 향해 던지는 돌은 결국 네게로 돌아온다. 그러니 긍정적인 에너지를 뿌리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다.
예전 직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장의 신임과 총애를 한 몸에 받은 덕분에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간 그는 안하무인 캐릭터로 거침없이 행동했다. 거의 모든 임직원이 그의 눈 아래에 있었지만, 유독 나에 대해서는 어려워하는 기색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꽤나 직감적으로, 그래서 온몸으로 전해지는 그 불편함이 나도 참 어색했다.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이성으로 호기심을 꾹꾹 눌러가며 왜 그럴까 의문을 품던 중 우연히 그의 속내를 알게 되었다. 아니 그는 나의 입사를 반대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본인이 내 영역까지 휘뚜루 바뚜루 잘 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이 동반된 확신과 함께) 왜 첫 대면부터 나를 싫어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었다. 내가 그의 눈에 거슬렸던 걸까? 내 기골이 장대해서 그의 레이더에 잘 걸려서일까? 아무튼 속으로 쳇! 하고 말았다.
예전 같았으면 생각에 생각을 물고 늘어져 그 끝을 꽝꽝 찍어야 직성이 풀렸겠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던 거다. 첫 번째 이유는 피곤함이었다. 그와 같은 사람에게 신경을 쓰고 에너지를 소비하는 게 지쳤다. 두 번째 이유는 그가 나를 대할 때 느끼는 부담감이 점차 측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국 싫어하는 것도, 꺼려하는 것도 품이 드는 일이다. ‘나 너 불편해. 너랑 일하게 된다면 결사 반대야.’라는 검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것도 결국 노력이다. 그 행위를 하는 사람도, 그걸 당하는 사람도 모두 에너지를 쓰게 된다. 물론 세상에는 굳이 뭘 하지 않아도 보기만 해도 싫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나 역시 그‘싫은 사람’ 중 하나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만인의 연인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다가오는 사람에게 짖거나 물지는 않는 나인데, 그런 나를 배척한다는 걸 쉽게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말이다.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면 더 이상 불필요한 안테나를 가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개운함과 시원함이 쉽게 찾아온다. 예를 들어 어떤 임원이 실력도 없는데 하늘이 도와 승진했다고 하자. 그런 모습을 보면 ‘나도 못하는 임원을 저 사람은 감히 어떻게… 전생에 몇 나라를 구했나?’라는 생각할 수 있다. 입이 써 축하의 단 한마디도 내키지 않고, 얄밉고 짜증이 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에너지를 왜 환상적인 행운아에게 쓰는가? 힘이 남아도는 천하장사도 아닌데.
옆에서 그런 에너지를 쓸데없이 뿜어내는 사람을 보면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는 것이 상책이다. ‘승진은 하고 싶지만 현실이 따라주지 않으니 열등감을 표출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말미엔 맞장구치지 않는 것이 맞다. 오래 곁에 있다 보면 그 부정적인 에너지가 나에게 전염될 수 있기 때문이다.
헛헛한 마음을 폭발적인 험담과 시기심으로 채울지,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뭔가를 끼적여 볼지,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거리를 둘지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다. 중요한 건 첫 번째 선택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뭐 두 번째 선택이 언감생심이라면 세 번째 선택이라도 시도해 보기를 주문하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명료해지는 것은 좋은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쁜 에너지로 인해 나를 소모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 그 하나만 짚고 넘어가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을 감히 장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