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그림자와 마주하기: 방어기제
왜 그런 때 있잖아요. 답답해서 내가 다 하겠다고 해놓고는 답답하고 더는 이꼴 저꼴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거나 뜨고 싶지 않을 때, 그럴 때는 ‘흐린 눈’을 생각하세요.
예전에 모시던 상사가 특정한 분야의 인력채용에 난항을 겪자, 제가 좀 보조를 맞추며 해보겠다고 오지랖을 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가 너무나 진지하게 걱정하고 안절부절해서 그의 감정에 깊숙이 이입이 된 터라 어떻게든 그가 짊어진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던 선의도 있었고, 그 상황에서 나 역시 벗어나고 싶은 욕망 또한 있었습니다.
사실 특정인이 고용되기 전까지만 도움을 주는 정도로 가벼이 생각해서 시작했지만, 추후 막상 내 보조의 그 결과값에 대해 타박을 받는 것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죠.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영화 <부당거래>에서의 말처럼 “호의가 지속되면 권리인줄 안다.”지요? 조금은 서운함과 후회가 밀려오더군요.
그런데 말이죠. 이 애매모호한 감정들은 온전히 그의 행동에서 비롯되었을까요? 아니요. 결국 그건 내가 이 오지랖을 피면 나를 그가 어떻게든 알아줄 것이라는 옅은 예상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 기대치에 그의 타박은 한참 미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마이너스였죠. 냉정히 보면 인정받길 원한 나의 기대탓이지, 그가 잘못한 것은 크게 없습니다. 더불어 그를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은 그 의도가 나의 선함에서 시작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상황을 어떻게든 매듭짓고 모면하고자 하는 일종의 몸부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즉 내 방어기제가 과하게 그리고 불필요하게 책임지려 하는 행동으로 이어진거죠.
사실 이런 상황들은 내게 자주 있어왔습니다. 아마도 내가 맏딸이라 책임을 지고자 하는 태생적 한계 또한 있을 겁니다. 나의 한계는 아랑곳하지 않고 뭘 떠맡게 되면 주로 내 감정의 탈이 나는 여러 사례들을 겪으면서 팔을 걷어부치고 솔선수범해서 ‘홍반장’ 같은 바지런하고 주도적인 역할은 나의 역량이나 상황에 대한 철저한 미러링에서 비롯된 후에나 해야 된다고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함광성의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을 보고 무릎을 쳤는데요. 자꾸 무턱대고 책임만 지는 나같은 사람에게 권하는 묘책이라며 ‘흐린 눈’을 이야기했습니다. 왠만하면 입이 대빨 나오더라도 내가 다하는 편이라 이 문구를 본 후, ‘그래, 이제는 좀 영민하게 둘 중 눈 하나 정도는 질끈 감자.’고 스스로 되뇌이곤 합니다.
저자는 정말 중요한 것은 눈 크게 뜨고 또렷하게 봐야되지만 그보다 가치가 없다 판단하면 조금씩 흐리게 눈을 떠보자 했습니다. 나이가 될수록 이런 이야기에 자꾸 홀깃한 이유는 아마도 지치지 않기 위해 오래가기 위해 선택과 집중이라는 전략을 사용해, 몸과 마음을 좀 아끼면서 살아가자는 거겠지요.
즉 가끔은 널부러질 시간이 필요하고, 멍 때리고 이쯤에서 그만 두기도 하고 힘을 빼야지요. 언제까지나 두손 걷어붙이고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맹렬히 노려볼 수 있을까요? 이젠 그만큼의 에너지 레벨이 되지 않아서 그런지, 쉽게 눈부터 시렵고 풀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제 나이만큼이나의 ‘흐린 눈’ 보급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내 상황과 내 감정을 넘어서는 것만은 막기 위한. 45세라면 45퍼센트의 흐린 눈, 50세면 50퍼센트의 흐린 눈(50세면 반쯤은 감고 있어야겠네요). 그렇게 선택과 집중을 하며 눈을 혹사하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어리석음은 덜하는 개운한 내일을 맞길 기대해봅니다.
p114 정말 중요한 것은 눈을 크게 뜨고 보되, 덜 중요한 것들을 바라볼 때는 조금씩은 흐리게 눈을 떠보는 용기를 내어 보길 바랍니다. (한광성, 나에게 괜찮다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