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그림자와 마주하기: 강박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한 현대사회는 ‘행복’이라는 개념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다는 주장에 대해, 나는 깊이 공감한다. 물론, 행복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행복이 이렇게 거대한 산업과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삶에서 의미 있는 요소임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한 시대의 주된 이데올로기가 강박이 되고 산업으로 변하면서 강제로 그것을 요구하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이 인생 내내 행복하고 활기찬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잘못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게, 정지우)
이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행복과 활력, 무한한 회복력과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쳐 나는 상태보다는, 때로는 고요하고 편안하며 가라앉은 상태가 더 나을 수 있다는 저자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삶에는 나쁜 순간도 있고 불행한 순간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그런 시기를 이겨내면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런 과정이 진정한 행복보다 더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할 수 없듯이, 행복 또한 각자의 방식대로 존재할 수 있다.
나이들면서 행복을 마치 다른 사람들에게 전시하듯 보여주는 문화가 유독 불편하게 느껴졌다.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의 경우 자신의 행복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며 웃고 떠드는 모습에서 거부감도 느꼈다. 내가 예민할 수도 있겠지만, 그 특정 개인의 행복이 왜 나에게 강제로 공감해야 하는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때로는 그 자체로 일방적인 강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누군가가 말했다. "부러움은 갖고 싶은 것을 나타내지만, 질투는 그것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운 감정이다." 나는 남의 행복에 대해 부러움이나 질투를 느낀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행복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의식적인 노력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행복 염려증(Happycondriacs)’이라는 개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는 마치 건강 염려증처럼, 행복이 넘치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는 상태를 의미한다. 내 안에서 완전히 부재함을 확신한다. 즉, 나는 행복을 목표로 삼기보다는, 오늘 하루 일상을 편안하게 마무리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을 느끼고 싶은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왔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교과서에서 나오는 듯한 철수와 영희네 평화로운 집안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던지라 무슨 일만 일어나지 않으면, 무탈하다면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해왔고, 자의반 타의반 행복에 대한 기대치가 없는 훈련을 해와서일까. 탁석산의 <행복 스트레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람은 좀처럼 행복해지지 않으므로 행복해지는 데 시간을 쏟다보면 세상을 행복하게 할 시간은 아마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렇듯 행복에 대한 기준을 조금 낮추고 더불어 나의 행복 수위를 조절하려면, 행복을 강요하는 환경에서 본인을 보호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더이상 지들끼리 낄낄대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지 않고, 겉도는 이야기 위주인 모임에는 더는 참석하지 않는 것 말이다.
강요나 강박이 아닌 진짜 ‘행복’이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생각해보면 그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와도 연결된다. 능력으로 정상에 오를 수 있지만 정상에 머무르게 만드는 것은 성격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서 정상을 행복으로 바꿔보면, 결국 각자의 여정 속에서 행복은 본인의 캐릭터와 취향대로 느끼는 순간들의 집합.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는 행복한가. 이 글을 적고 있는 나는 행복한가.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행복이 강요나 강박이 아닌 진짜 우리의 것인가.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보는 조용하고 심심한 일요일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