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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어도 쓸모있음에 대한 강박

내면의 그림자와 마주하기: 강박

by 변한다

"낙엽을 치우지 마세요. 그 속에 꽃씨가 자라고 있어요!"


나이가 들어도 쓸모에 대한 강박은 어쩌면 인간 본성일지도 모릅니다. 최근 이순재 배우님의 수상 소감에서 "연기는 연기로 평가해야지 인기나 다른 조건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듣고 깊이 감명받았습니다. 1935년생으로 올해 89세가 된 그는 역대 최고령 연기대상 수상자로서 나이와 무관하게 실력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연기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사회가 나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현재 국민소득 5만 불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동시에 노령 인구가 세계 1위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죠. 그러나 이 속도에 맞는 적절한 대비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사회의 1/5에 달하는 노인층이 우울과 소외 속에서 살아갈 위험이 큽니다. 그러면 밝고 명랑한 노년을 보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해답은 살아온 다양한 경험을 집대성하여 후세에 전하고, 자신이 쓸모 있다고 느끼는 순간에 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비로소 소외감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태성의 『역사의 쓸모』를 읽으며 공감했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저자는 태극기 부대 어르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들의 배경과 삶을 이해하지 않고 단정 짓는 건 위험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나 역시 내 아버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6.25 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어린 시절의 기억, 북한 군인들의 수색에 오돌오돌 떨었던 순간들, 전쟁 이후 고단한 삶을 견디며 쌓아온 사상과 가치관… 이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는 자신을 버티게 한 삶의 방식이자 쓸모였던 것입니다. 흔히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이라며 우린 쉽게 비판하지만,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역사와 맥락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전쟁을 겪은 아버지의 삶과 인생을 내가 온전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틀딱이다", "극우다" 같은 ‘혐로(嫌老) 사회’의 단적인 징후 같은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에게 그 생각들은 지금껏 자신을 버티게 한 '쓸모'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노화공포증이 만연하는 것은, 어쩌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노화를 스스로 등한시하며 무시하는 탓이 아닐까요? (너도 나도 늙어가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의 진정한 복지는 단순히 생명 유지 차원을 넘어, 사람들의 사고와 견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체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단지 오래 사는 것만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더 중요합니다. 노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수동적으로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전히 쓸모 있는 존재라는 확신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기술의 발달 속도는 너무나 빠릅니다. 스마트폰 하나가 만들어낸 새로운 사회상은 세상을 더욱 빠르게 돌아가게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었습니다. 과거에는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지식과 지혜가 존경받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지식조차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년의 쓸모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아쉽게도 결국 답은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시대가 강요하는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가 가진 경험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이순재 배우가 최고령 대상 수상을 당당히 받은 것처럼 말이죠.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는 "금속이 진화를 거듭해 금이 된다."라는 연금술의 비유를 통해, 꿈을 잃지 않고 추구하다 보면 결국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 메시지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만큼 자아를 잃기 쉬운 환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술과 속도에 밀려 자신을 잃어가는 사람들에게 자아를 찾으라는 외침은 절실합니다.


우리 사회는 이제 나이듦에 대한 시각을 바꿔야 합니다. 단순히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쓸모를 잃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가진 경험과 지혜를 후세에 전하고, 새로운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효용입니다. 팔짱 끼고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보다는 '어서 와, 나이듦은 처음이지?'라고 덤벼보는 적극적인 대처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오늘 내가 하는 차별과 혐오는 미래의 나에게 고스란히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김찬호의 『베이비부머가 노년이 되었습니다』에서 나이듦을 산행에서의 하산의 예로 들었던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저자는 일본 규슈 지방을 여행할 때, 어느 마을에서 ‘하산회’라는 모임을 접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중년 이후 내리막길을 잘 내려오기 위해 공부하고 실천하는 모임이었다고 합니다. 산행에서는 등산보다 하산을 할 때 사고가 잦고 길을 잃을 위험이 높은데, 이는 인생과 같기 때문에 나이듦의 요령을 잘 익혀보자는 의미였습니다.


진정한 지성의 쓸모란 세월을 뛰어넘어 살아남는 그 무엇,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 그것이 진짜 효용입니다. 그렇다면 40대의 나에게는 무엇이 쓸모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눈꺼풀이 턱까지 내려옵니다. 단언컨대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나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누구나 나이가 든다는 점을 항상 까먹지 말고, 우리 자존감을 지키며 기억 속에 남는 온전한 어른이 되어 봅시다. 우리 스스로가 만든 쓸모 있는 삶이야말로 그게 행복 아니면 뭘까라는 자신감을 챙기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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