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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한다 May 03. 2022

그러든지 말든지 쩡한 책이나

독서사색

외할아버지, 친할아버지 두 분 다 고향이 황해도 해주다. 임진각서 고향을 바라봤던 외할아버지의 처연한 모습이 아직도 가끔씩 기억난다. 실향민의 손녀 태생은 정녕 속일 수 없는건가. 나는야 냉면 매니아, 특히 슴슴한 평양냉면을 좋아한다. 대학시절부터 고된 알바에 찌들어 있을 때 요놈으로 구원받곤 했다. 혼자 자리를 타고 앉아서 무절임 오독오독, 냉면 육수까지 리필해 먹곤 했으니


북한에서는 맛있는 걸 먹을 때 ‘쩡하다’는 표현을 쓴다는데, 책은 쩡한 냉면과 같다. 특히 덮고 나면 쩡한 기분이 싹 올라오는 것은 진짜다. 지난 주말이 그랬다. 얼마 전부터 어떤 분이 업무 외로 홍보메시지에 대해 계속 내 의견을 묻는데 주말에 최고 상한가를 쳤다. 근데 김빠지게도 핵관(핵심관계자)까지 제대로 전달도 관철도 안 되더라.


그 주된 이유가 그 분의 역량 부족이라 쳐도 나는 왜 이 아까운 시간에 쓸데없는 조언질에 내 에너지와 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가를 돌아다보니 결국 화가 치미는 거였다. 사실 이 화는 내 가없는 조급함에서 오는 거였다. 우리가 불안감을 느끼면 그런 감정들이 자꾸만 우리 의식 경계를 넘보고 침범한다. 그러면 집중력을 잃을 수 밖에 없거든.


어버버 추해지기 전에 정신줄 부여잡는 방법 중 하나, 조급함을 한두 스푼 버리고, 소소한 목표를 가지고 독서하면 된다. 이틀에 걸쳐 최현미의 <사소한 기쁨>을 포함한 7권의 책을 읽으며 집중했다. 그리고 서서히 원 상태로 돌아오는 회복감에 흡족했다. 결국 정복에 성공했단 느낌적인 느낌, 물론 지금까지 피곤에 쩔었다만 이건 진정 품위 있는 피로다.


시라토리 하루히코는 <지성만이 무기다>에서 니힐리즘 즉 자기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찾지 않아 생기는 이 증상을 타개할 방법을 바로 독서로 보았다. 책을 읽는다는 건 그 책에 활자 그대로를 곧이곧대로 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어떤 의미나 가치를 헤아리는 적극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사람의 일생에는 멋진 날이 있는데 하나는 태어나는 날이고, 다른 하나는 의미를 깨닫는 날이라고 했다. 그래, 어떤 요구에 주로 예스 하고 대응하는 약간의 수동적이라는 가면 쓴 삶에서 벗어나 내 안에 갖춰있는 자발성과 의욕을 마구 꺼내보자. 진정한 동기부여는 외부에서는 주어지지 않으니까


돌이켜보면 사실 처음부터 들어줄 필요가 없는 요청이었는지도 모른다는 후회 따윈 하지 말자. 집착하거나 넘겨짚지 말 것이며, 자기채점 따윈 줘버려. 오직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책과 마주하자. 시간 같은 것은 마치 있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열중하는 거다. 그렇게 되면 조급함이나 심리적 절박감은 사라진다.


문득 양희은의 <그러라 그래>의 한 문구가 맴돈다.


 “고명 하나 없는 냉면처럼 나의 일상도 군더더기는 덜어내고 담백하고 필수적인 요점에만 집중하고 싶다.”


어쨌거나 냉면같이 쩡한 책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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