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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까짓게 뭔데'에서 이미 졌습니다

내면의 그림자와 마주하기 : 모멸감

by 변한다

그를 깎아내린다고 내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를 업신여긴다고 내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 박노해



모멸감. 이 단어가 떠오를 때, 우리는 흔히 그것을 단순한 외부의 공격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모멸감은 사실, 우리 내면의 빈틈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모멸감은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심리학자 배르벨 바르데츠키는 "우리가 모멸을 느낀다는 것은 모멸 행위 그 자체보다 우리 자신과 더욱 관련된 문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서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모멸감은 단순히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것은 결국 내면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20년 넘게 한 회사에서 일했습니다. 그동안 강산이 두 번 바뀌었고, 많은 일들이 그를 지나쳤겠지요. 대기발령, 권고사직, 갑작스러운 업무 배제까지, 그의 삶에 닥친 시련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와 두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눈 후, 떠오른 사자성어는 "건곤일척"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견디기 어려웠던 점은, 자신보다 품격도 역량도 부족한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고통과 불안 속에서 그는 그저 모멸감을 가슴에 품고 묵묵히 버티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예전 직장에서 만났던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이들이 그에게 머리를 조아릴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직급은 주임이었지만, 높은 사람과의 관계 덕분에 사실상 실세였죠. 어떤 임원들은 그가 모시는 분과의 일정을 맞추기 위해, 아랫사람들에게 불편한 심부름을 시킬 정도였습니다. 저 역시 그런 일을 자주 맡았던 아랫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처음엔 직급도 낮은 그가 계속해서 내게 트집을 잡고 모욕감을 주었을 때, 심한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그의 전화는 피하고 싶을 정도였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감정은 점점 무뎌졌습니다. 결국, 저는 그와의 연락을 단지 3분짜리 연기처럼 여길 수 있었습니다. 왜냐고요? 나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 모멸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결국 그 상황에서 해결해야 할 사람은 나였고, 그는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그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람은 종종 외부에서 강제적으로 주어지는 모멸감에 의해 휘둘릴 수 있습니다. <모멸감>의 저자 김찬호는 이 감정을 "한국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든 감정"이며, "사람이 다른 이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감정 폭력"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모멸감을 단순히 외부의 비난이나 무시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모멸감은 우리가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기분을 들게 만듭니다. 이 감정은 우리 내면의 불안을 자극하고, 심리적인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점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사실 대부분 추측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우습게 여겼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았는지는 우리가 물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입니다. 내가 그 감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내 존재의 가치가 위협받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때,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더욱 큰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모멸감은 피해의식으로, 그리고 때로는 복수라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 중심을 잘 잡고,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인 행동에 지나치게 연결되지 않도록 노력한다면, 모멸감도, 피해의식도, 복수를 원하는 마음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감정에서 벗어나려면 꾸준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니 까짓 게 뭔데?“ 이런 말을 입에 담기 전, 이미 우리는 감정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말부터 삼키고 우리, 이제 더 이상 모멸감에 휘둘려 잠 못 이루는 나날들을 손으로 헤아리는 루저가 되지 않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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