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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나 누군지 알면서.” 의 모순

내면의 그림자와 마주하기 : 모욕감

by 변한다

세상이 너를 버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세상은 애초에 널 가진 적이 없다. - 롬멜


“너 나 누군지 알면서.” 사실 그 누구도 당신을 제대로 알 필요는 없습니다.


“난 아직도 꿈을 꿔. 그년과 그놈이 나와서 나를 괴롭혔지.”

이 말은 전 직장에서 겪었던 모욕감이 떠올릴 때마다 반복하던 혼잣말입니다. 그때는 그 기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한동안 참 많이 괴로워했죠. 여기서 잠시, 모욕감과 모멸감은 조금 다릅니다. 모욕감은 상대방이 나를 부당하게 대하며 화가 나는 감정이고, 모멸감은 ‘은연중에’ 무시당하면서 느끼는 감정이죠.


그때 상황은 이랬습니다. 상사가 회식 자리에서 남자친구가 있는 동료에게 취기를 빌미로 사적인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피임, 성관계 등과 관련된 민망한 이야기였죠. 그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고, 그를 상사와 떼어놓고 다가가서 그 다음 날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하며 사내 노무사를 소개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상황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후배의 문제를 돕겠다는 마음으로 나섰지만, 아니나다를까 그 후배는 내가 이 기회를 통해 직속 상사를 밟고 승진하려 했다고 오해했고, 내게 오히려 냉랭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때의 기분은 참 묘했습니다. ‘너마저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구나.’ 서운함과 자괴감이 밀려왔습니다. 사실 그와는 자주 퇴근 후 봉사활동을 하며 가정사 등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였기에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후, 나는 부적절한 언행을 했던 상사에게 단단히 찍혀 낮은 등급의 평가를 받았고, 추후 그 부서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너 나 누군지 알면서’ 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게 되었고, 누구도 본연의 나를 제대로 알아주길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내 마음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막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습니다. 의도가 좋다고 해서 결과도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요. 내가 동료를 돕고자 한 동기는 순수했지만, 그 결과로 다른 부서로 떠나게 되고, 후배와 주위 사람들은 나를 남의 약점을 유리한데로 이용하는 몹쓸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실망감이나 아쉬움을 느낄 필요는 없었습니다. 결국, 상대방은 나를 제대로 알 필요도 없고, 그런 기대를 품고 낙담할 이유 또한 내겐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믿고 싶은 대로 보고 싶은 대로 믿고 볼 뿐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잘 알게 되면 그것은 행운일지 몰라도, 그렇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불행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죠. 강산의 <어차피 남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흔히 사람들은 큰 인물의 도량을 찬양하는데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도량은 타인에 대한 심한 모멸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았다고 합니다. 결국 위대한 정신승리자들은 주위 사람들을 자기와 동등하게 보지 않으며 그들에게 기대하지 않죠.


맞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오해를 해 부당하게 나를 취급한다고 모욕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에서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모욕감을 주고받으며 상처를 받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결국, 그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죠. 모욕감이라는 상처에 본인을 순순히 허락하지 마세요. 우리의 존엄과 우리의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 그런 감정들로부터 철저히 자유로워지는 그날까지, 우리 조금씩 도량을 넓혀보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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