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얽힘을 풀다 : 복수심
어떤 모욕을 당할 때마다 복수하고 싶은 기분을 멀리하기 위해 무덤 속에 조용히 누워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이내 누그러지곤 했다. -E.M. 시오랑-
오전 내내 마음을 졸였습니다. 여름 동안 두 달 간 주말마다 실습했던 일지와 서류에 대한 합격 통보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교수님 사무실로 서류를 안전하게 배송한 후 한 달이 넘도록 아무 연락이 없다가, 이제야 데드라인 며칠을 남겨두고 수정하라는 통보가 온 것이었으니까요. 모든 절차와 일정을 지켰지만,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고, 그 자체로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때, 그 놈의 곤조에 당한 셈이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곤조’를 찾아보니 근성의 비표준어라고 나옵니다. 어라? 근성은 'grit'이고, 그것이 내 특징이기도 한데, 보통 근성은 질긴 정신력을 뜻하지만, 지나치면 고집이나 불통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 고집을 ‘곤조’라고 부르기도 하죠. 남들이 쉽게 가는 길을 나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타인의 ‘곤조’와 마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과연 나는 사사건건 바로잡으려는 성향에 문제가 없는지, 왜 자꾸 이런 상황에 처하는 것일까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화가 치밀어 오르며, 교육원 홈페이지에 민원을 넣어 내가 옳고 억울하게 당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작은 복수라도 할까 고민한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시형의 <신인류가 몰려온다>에서 저자는 중년의 터닝포인트를 ‘나’보다는 ‘타인지향’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즉, 내 기준에 맞춰 기분 나쁜 것들을 지적하거나 훈수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죠. 내가 좋아하는 사자성어 ‘수처작주(守處作主)’를 빗대어 생각해보면, 그는 교수로서 최선을 다했지만, 그 과정이 내게는 결국 ‘곤조’였고, 나는 학생으로서 그 위치에서 맡은 바를 다하면 그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비록 자존심이 상하고 구차한 상황이지만, 결국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는 내가 숙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불평불만을 잊고, 머릿속 새로 고침 버튼을 눌러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그리고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단 3시간만 통화가 가능하다는 교수님께, 2시 59분에서 3시로 가리키는 시계의 큰 바늘을 확인하자마자 급히 전화를 시도했습니다. 대종상급의 연기로 수정할 부분을 최대한 공손히 여쭙고, 당장 고쳐서 출력해 택배로 보내겠다고 말씀드리며, 마음에도 없는 ‘감사’를 침이 마르도록 여러 번 내뱉었습니다.
그때, 영화 <이터널 션샤인>이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는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다."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소중한 경험일지라도 때때로 그것이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오히려 잊는 것이 더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맞습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지려면 복수하려는 사사로운 마음을 멀리하고, 의도적으로 기억의 회로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 복수심의 기원은 나의 곤조일 수 있고, 적당한 망각은 어느 곳, 어느 처지에서든 주관을 잃지 않고 자신의 주인이 되라는 ‘수처작주’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길임을 깨달았습니다. 무엇이든 바로잡고 이겨먹으려 했던 마음을 놓아버리니,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한 오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망각과 깨달음 그 어딘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