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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한다 May 07. 2022

비움의 독서

독서사색

덩치에 맞지 않게 평생의 눈물을 모조리 저 따뜻한 남쪽 어느 도시에 쏟아내어 더 이상의 눈가의 물기조차 남아있지 않은 나에게 40대 중반이 되니 참 희한한 이상반응이 있다.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책이나 영상, 뉴스를 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주르륵 그것도 하염없이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보면 당사자가 자신의 고통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그 위치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고 한다. 즉 고통을 느끼는 당사자가 자신 속에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분리돼 곁에 서는 것, 그것이 당사자가 자신의 고통에 관해 제대로 말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고통을 느끼는 자가 고통과 본인을 분리하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곁을 내주고 공감과 위로도 마찬가지. 그럼 내가 흘리는 눈물은 이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맞물려 실행된 결과물인가를 되돌아보게 된다. 사실 내가 생각하는 고통은 찰나가 아니고 ‘늘’이다. 그래서 사람은 혼란만 겪다가 생을 마감한다는 염세주의적 생각에 무척 가깝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다. 고통 속에 있다가 잠시 한 줄기 빛도 있는 거고 섬광처럼 스치는 사랑도 실낱같은 희망도 있을 거다. 일종의 마취제 같은 행복의 순간들과 잠시들이 있겠지. 오늘도 그랬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한 하루, 잠시 숨을 돌리며 기대를 잔뜩 했던 어떤 홍보물을 훑어보니 기승전결이 맞지 않아 코멘트 폭격 날리다 문득 드는 생각...또 나쁜 사람 되어버렸네. 


내가 속한 조직은 좋은 사람이고 싶은 사람들만 가득한지라 나는 이미 나쁜 사람이다. 정확히 말해서 타인에게 주로 고통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그걸 알게 된 나 역시 고통인 거다. 하나 분명한 건 이젠 적어도 억울하지도 않다. 애초부터 나는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닌 사람이기에 좋은 사람인 척을 포기했다만. 갑자기 생각나는 책 제목, 김재식의 <좋은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면 돼> 


난 이걸 적어도 나한테는 ‘나’면 된다로 해석한다. 살아가면서 좋은 사람이라는 척을 해서 힘겹게 가지는 좋은 이미지보단 중요한 건 ‘나를 잃지 않는 것’. 나에게는 최대한 고통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타인에게 전하는 게 비록 고통일지라도 그게 정당하다면 불필요한 죄책감 따윈 갖지 않으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남아있는 꿉꿉한 감정을 마주할 때마다 ‘사는 게 고통’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으며 비워낸다. 


고통으로 인해 적어도 내 삶의 방향과 좌표를 잃고 무료함이나 권태에 빠지진 말아야지. 복잡다단하고 도돌이표 감정 속에서도 기운을 주고 목적의식을 되살려주는 문득 떠오르는 건 바로 ‘이유’ 라는 두 글자. 나의 ‘왜’가 있어야지 한층 간결해지고 선명해진다. 적어도 내가 하는 모든 일이나 행위에서 말이다.  


아무튼 오늘도 토닥토닥 수고많았다. 독서로 걷기로 개워내자. 잔여 감정을. 오직 더 상쾌한 주말을 맞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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