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잃지 않기까지의 기록

프롤로그

by 변한다




“이제는 더 쌓기보다, 꺼내야 할 시간이다.”


새벽 공기를 가르는 첫차를 타고

경상도 남쪽의 어느 도시로 향했던 날이 있었다.

우중충한 아침을 뚫고 가

한 시간 넘게

독자님들을 만났다.


“지옥으로 가는 길엔 부사가 덮여 있다.”

스티븐 킹의 말을 빌려

불안과 걱정,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가장 신뢰하는

생각 정리법은 글쓰기라고 말했다.


출판기획서를 어떻게 써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복잡한 요령 대신

세 가지만 이야기했다.

이 책을 왜 쓰는지,

누가 이 책을 읽게 될 사람인지,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

스스로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는지


20대 독자분께는

지금 이 나이에 글쓰기를 시작한다면

훨씬 정돈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남기고 싶은 건

글로 적어두라고.


채우는 데만 몰두하지 말고

비우고, 고르고, 집중하는 힘을 기르는 데는

책만 한 간접경험이 없다고도 했다.

아이를 키우며 자주 드는 생각은,

내가 살아온 시간의 지혜가

아이와 후배에게

과연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다.

그래서 함부로 충고하거나 평가하기보다

그 시간에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공부하고, 쓰는 쪽을 택하자고 했다.


죽기 전까지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자신만의 이야기 하나쯤은

끝내 꺼내놓아야 한다고

“내일 하겠다, 아니 모레가 더 낫겠다.”는 말로

시간을 미루지 말고

판단이 섰다면 오늘,

책상 앞에 앉아보시라고 했다.

오늘 나를 만나

단 한 사람이라도 글을 쓴다면

그걸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그날 돌아오는 길에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리고 며칠 뒤,

어느 출판사 대표님과 통화하며

회사 일과 내 일을 섞어 이야기하다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이 혹시

내 이야기를 제대로 꺼내야 할 때는 아닌지,

하늘이 나에게

벼락과 같이 신호를 보내는 건 아닌지.


그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작가님,

이제 그만 인풋하시고

당신을 내놓을 때입니다.

지금이 그럴 시간입니다.”


그 말은 충고라기보다

허락처럼 들렸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가장 듣고 싶었고,

가장 필요했던 문장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더 쌓기보다

꺼내야 할 시간.

모으는 시절을 지나

조심스럽게 밖으로 건네는 삶으로

나는 이 책을

그 첫 걸음으로 삼아보려 한다.


이 책이

지금 당장 무언가를 바꾸지 못하더라도,

당신이 잠시 멈춰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을 버티느라 애쓴 마음을

함부로 다그치지 말고,

이 페이지들 사이에서만큼은

조금 느슨해져도 괜찮다.


이 책은

그렇게 당신 곁에

조용히 놓이고 싶다.

캡처.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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