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사색
선거철이다. 예전엔 관심조차 없었던 공보물이 이상하게 눈에 들어오더라. 너나 할것없이 일꾼이라 하지만, 내 동네에 뭐가 필요한지 알지도 못하고 개나 소나 지껄이는 천편일률적인 정책들. 참 황당한 것은 행정이 해야 할 일을 어떻게 국회의원이 주도적으로 하겠다는 건지, 시장이 나서서 할 수 없는 법제정을 왜 제1공약으로 내세웠는지 기본적인 것조차도 구분이 되지 않는 이런 류의 것들도 요즘 핫한 ‘반지성주의’처럼 유행인지 무척 궁금했다.
27세에 회사에 들어가 배운 건 세상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드넓고 할 일은 무지하게 많다는 것.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기술 하나만 있으면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했는데, 2005년 남쪽 나라에 위치한 회사에 들어가 겪게 된 첫 충격이었다. 그 전까지는 열심을 다한 공부가 아니면 인생이 폭망인 줄만 알았거든. 어쨌거나 입사하고 바로 사보를 만드는 걸 거들었는데, 난생 처음 용접하는 아저씨, 도장하는 아주머니 동료들을 어떻게 인터뷰했을까.
지금 와 생각해보면 이른바 ‘공부왕 찐천재’ 홍진경 방법을 구사했었다. 일차방정식과 일차함수를 배우는 과정에서 모르는 건 정말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그 리얼함과 비스무리하게 일찌감치 ‘조린이’라는 걸 즉 ‘조선업은 아무 것도 몰라요.’ 무장해제한 백치미를 무차별적으로 내뿜었다. 그러니 나 스스로 스스럼없이 다가가기 쉬웠고 덜 떨어지고 모자란 내 모습에 몇몇은 빼꼼 마음의 문을 열었는지도 모른다.
책읽기도 그렇다. ‘그래, 나보다 뭘 더 아니까 이렇게 번듯하게 출판도 하는 거지’ 모르면 딱 까놓고 모른다고 인정하며 마음을 훅 내려놓고 나서부터 읽기를 시작하면 술술 잘 읽힌다. ‘나도 알거든? 으흠, 두고 보겠어’ 팔짱끼고 벼르며 읽는 건 시작부터 틀려먹은 거다. 내 경우 마케팅이나 홍보, 독서 관련 서적을 읽을 때 유독 이런 시건방짐과 뾰족함 둘다 탑재되곤 한다. 특히 모 IT 기업이나 어플리케이션 회사에서 몇 년 경력을 내세운 에필로그에서부터 벌써 째려보게 된다.
참 되먹지 못하게 유치하지 않은가. 글배우의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했다>를 보면 부자가 되는 법 3가지가 나온다. 하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걸 확실히 정하고 둘째는 실패할 준비를 하며, 마지막은 집중한다는 것. 이걸 ‘제대로 읽기’로 바꿔도 무방하다. 물론 이 세 가지 방법의 전제는 곧 ‘인식’이다. ‘겸양적 인식’, 내가 모르고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알아야 읽고자 하는 걸 정할 수 있고, 읽다가 이해하지 못함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는 것
그러다가 몰입해 눈에 힘 풀고 ‘오호라’ 기합 넣고 보게 되면 하나라도 건질 수 있다. 이 삼박자가 어우러진다면 제대로 읽기가 가능할 것이다. 더군다나 젊은 작가가 연륜이 적은데 대체 뭘 알겠어 등의 꼰대적 마인드로 메시지보다 메신저에 집중한다면 본질을 놓치기 일쑤니 세상 얇고 말랑하게 영민해져보자. 가끔씩 겸양은 안드로메다에 두고 레이저부터 뿜뿜 발사하는 내가 꼭 명심해야 할 부분인 것 같다.
“손을 넣어 대지의 가슴을 만져보라, 추운 겨울의 얼어붙은 것 같았지만 아니다. 그 얼음으로 인해 이제 우리의 보습을 받을 준비가 돼 있다.” 톨스토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에서 아마도 내려놓으면서 내 분수를 아는, 비우면서도 나를 깨우는 그런 자세로 겸양적 독서까지 하는 자는 더 이상 책이 필요없는 이미 현자가 아닐는지, '겸양지덕' 난 아직 멀었기에 여전히 독서하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