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사색
“그 많은 책이 기억나긴 해요?”
종종 SNS 친구들이 묻곤 한다. 독서하고 나서 습관처럼 간단히 쓰는 내 포스팅을 보고. 나는야 극한의 실용주의자. 자주 깜빡 하는 금붕어라는 핸디캡을 갖곤 있지만, 독서의 상수는 아웃풋이라는 생각엔 변함없다.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시원스레 밑줄을 긋는다. 인상적인 페이지를 사진으로 찍은 후 사진 파일에 밑줄 쫙, SNS에 간단한 소감과 함께 적어둔다. 물론 리뷰를 더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도 적지 않지만, 가급적 거르지 않고 한 줄이라도 남기려고 한다.
요즘 유행인 ‘필사’를 시도해봤다. 필사는 단순히 책 내용을 베껴쓰는 글씨를 연습하는 게 아니라 정성을 들여 한 문장 한 문장을 써내려가다 보면 글 안에 담긴 작가의 혼을 느낄 수 있다 하여 권하는 이들이 많았다. 허나 내 경우 예쁘게 필기한 기억만 있지 내용은 더 생각이 나지 않더라. 대신 어떤 책은 종이책 한 장 한 장을 넘겨가며 사각대는 소리로 인해 선명하게 기억 한 켠에 자리잡고, 기대감과 두근거림으로 봤던 그 순간들이 모여 긴 여운을 주기도 한다.
인생은 끝없는 모호함 속에 강렬한 한 조각으로 대번 결정되는 것처럼 독서도 마찬가지. 다 잊어버려고 다 지워지더라도 작지만 유의미한 내용의 단편들이 모여 내 허무와 고단함을 이겨내는 기폭제로 작용하더라. 즉 망각은 어쩌면 이 복잡한 세상을 견디어 끝내 살게 해주는 꽤나 든든한 힘이었다. 스콧 A. 스몰의 <우리는 왜 잊어야 할까>에서 내린 재정의를 보고 마음을 굳혔다. ‘망각은 본연의 진정한 인지능력이며 기억과 균형을 이룬 망각은 꼭 필요하다.’
그렇다. 우리는 예전부터 망각을 극복하려 부단히 애써왔고 자주 잊어버리면 마치 뇌의 작동 오류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흔했다. 언제나 더 나은 기억력은 고귀한 목표인 반면 망각은 방지하고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하는 대상이었지만 사실 나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했다. 잊음으로 인해 새로운 걸 받아들일 수 있는 틈이 생기고 본인에게 중요한 것은 다시금 상기하면서 그럼으로서 앞으로 한발짝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한 건 수많은 것들이 잊히더라도 그것은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기억하기 위한 과정이다라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선 슈테파니 슈탈의 <거리를 두는 중입니다>에서 나온 메타 태도에 주목해야 한다. 즉 지혜롭고 현명하게 기억과 망각의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으며 나의 기억, 느낌, 지각하는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주체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 더불어 불확실한 삶 속에서 터질 것 같은 꽉찬 머리 속에 잠시 쉼을 내어주는 것.
읽고 단면만 기억하면 뭐 어떠하랴. 잊어버려도 좋다. 지워버려도 좋다. 망각을 통해 읽는 내용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놓을 수 있는 이 또한 읽는 자의 특권임을... 사는 내내 내 기억 속엔 어떤 책들이 결국 남을까. 자뭇 궁금해지는 금요일 오후가 별안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