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사색
어제 자원봉사 활동가를 대상으로 ‘나를 지키면서 일하기’란 주제로 강의를 하는데, 질문이 들어왔다.
”어떻게 하면 거절을 잘 할 수 있나요?“ ”이견을 상사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나요?“
거절도 이견을 표현하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고, 최대한 예의를 갖춘 태도를 취하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했다만 지금 생각하니 강상중 선생님의 말씀도 보탤 걸 그랬네. <살아야 하는 이유>에서 인간의 세 가지 가치에서 그 하나는 ‘뭔가를 만들어 내는 창조’ 그리고 창조보다는 못하지만 ‘해보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으로 ‘경험’ 마지막으로는 인간의 진가는 바로 ‘태도’에 있다고 했다고 했다.
나 이 세 가지 중 가장 중요한 하나를 꼽으라면 역시 태도를 택하겠다. 즉 분명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즉 명확하지 않거나 불분명한 의욕이 생기게 하는 것에 정확하게 응답하는 것, 그게 실력이고, 본질이다. 옌스 바이드너의 <나는 단호하게 살기로 했다>에서 단호한 매운고추 전략가가 되라고까지 주문한다. 땡초까지 가지 않더라도 적어도 나이가 들수록 직급이 높아질수록 보이지 않는 책임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사이비, 가짜다.
책을 읽을 때도 그렇다. 이견에 나 스스로 설득되지 않을 경우 잠시 책을 덮고 숨을 고른다. 계속 째려보고 곱씹어보고도 납득할 수 없다면 나와 의견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NO의 입장은 쫀쫀하게 유지해야 하고. 물론 온라인 인터넷 서점에 평점테러나 악플은 하지 않으니 걱정은 넣어두시라.
예전에 읽었던 인구학자 조영태의 <정해진 미래>, 적군도 놀라 움찔하는 사춘기 소년을 키우고 있는지라 책을 읽다가 서울대 교수 저자 본인의 학습법이나 교육법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눈이 반짝였었다. 저자는 미래를 보면 사교육은 필요 없는 지출이고, 눈에 결국 보이고 그 돈으로 다른 활동을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는 부분에서 화들짝 놀랐다.
내 생각과는 참 많이 달랐다. 외람된 말로 아이들 교육에 과도하게 민감한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이야기 함부로 하면 어쩌누 별의별 걱정까지 더했다. 어떻게 성적만을 올릴 수 있는 교육이 세상 어디에 있던가. 공부를 하다보면 다른 예를 들어 학원에서 좀 어려운 단어를 외우며 고차방정식을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있다가 해결하다 보면 끈기와 집념도 함께 배울 수 있는 거 아닌지. 그렇다면 그런 교육에 들어가는 에너지와 시간, 돈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거 아닌가.
카스R선스타인의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에서 설령 개인의 의견이 사회의 지배적인 의견과 다르다 하더라도, 개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안도의 한숨…그래 나는 저자말에 잘 따르는거야. 더불어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라면 구성원들이 무조건적으로 동조하지 않고, 좀 더 활발하게 이견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나는 쏠리는가 이견을 내는 편인가. 물론 나이들면 들수록 벽에 가로막힐 때마다 침묵이나 가래끓는 음...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대체적으로 많아지는 것도, 일생이 모난 돌처럼 두들겨 정 맞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마모될 머리도 없다는 것 역시 사실이라는 시덥지도 않은 변명 또한 해본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노가 필요할 때마다 노를 외친다. 물론 노에 뒷받침해줄 대안이 있으면 더 좋고. 광야에서 나홀로 비바람 다 쳐맞는 일이 있을지라도 뭐 아닌 걸 아니라고 하지 못하면 왜 책을 읽고 배우고 성장하려 애쓰는가. 이런 저런 의문 따위를 품어보면서 그렇게 다이나믹 판타스틱 어메이징한 한 주를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