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어새 외침을 넘어

by 변한다

어느 외국계 회사의 커뮤니케이션 임원과 한국 언론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모 종편채널의 악의적 편집과 허위보도로 인해 회사 전체의 신뢰성과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한국의 언론 환경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절레절레 고갯짓에 몇 마디 보탰습니다. “일종의 쇼 비즈니스라고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작금의 현실은 이미 그런 풍토이며, 한 개인이 저항할 수도, 바꿀 수 없는 시스템이라는 게 분명 있을 겁니다.”


다행히도 그 회사는 언론중재위원회를 통해 반론권을 획득해 회사의 입장을 똑바로 내보냈긴 했지만 내겐 언중위 패소를 포함해 데였던 쓰디쓴 경험들이 다수 있습니다. 단독기사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승진에 상까지 받았으니 내 허탈감과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가급적 성실히 취재를 지원하고, 정확히 알릴 것은 알리고 가릴 것은 충분히 읍소했건만, 과장보도에 선정적인 영상편집에 더군다나 며칠 동안 쏟아지는 악플들에 대응하느라 피가 마르고 식욕이 없었던 날들이 떠올랐죠.


그때부터였습니다. 다치고 지친 마음을 스스로 달래며 전 세계의 단 6천 마리 밖에 남아있지 않는 멸종위기의 ‘저어새’ 주문을 외우곤 했습니다.


사람도 나름대로 애쓰는 거야.

,,,하고 안되면 말아

상 무너지지 않아. 워워워


모 신문의 사설을 보고 위안을 얻습니다. 그 당시 읽었더라면 그 뉴스가 나오는 TV 패널을 주먹으로 박살내고픈 분노까진 없었을 텐데. 언론이 단순 사실 오류가 아닌 견해에 대한 오류를 저질렀을 때 이를 바로잡으려면 몇 가지 선행조건이 있어야 하는데, 먼저 자신과 조직 내부가 오류인지 인지할 수 있는 구조로 형성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다른 견해에 열려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사실의 바탕 위에 의견을 쌓을 수 있는 일종의 분위기라는 게 마련되어야 한다는...


분명 본인이 사실과 다르게 뭔가를 가미해, 뻥튀기해서 글을 적시하는 것이 기사의 정도나 기자의 윤리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했을 시에는 분명 이유라는 게 있을 겁니다. 특종을 하고픈 개인적 욕심이 밑바탕 되겠지만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라는 것. 왜 서 있는 풍경이 사람을 바꾼다고 하지 않나요? 진실보단 빨리 빨리 한 건 터트려야 하는 경쟁 환경도, 오류를 바로잡는 걸 무능하다고 보는 시각도 크게 한몫할 것입니다. 허나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한번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부르듯, 그렇게 해서 성공을 쉽게 잡았다면 더 크게 해보고 싶어하는 몸부림은 늘 동반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도 몇몇 요주의 분들의 기사들을 찾아보곤 합니다.


저어새의 주문을 외치고, 골백번 마음의 위안을 주는 칼럼을 읽어도 한번 내보낸 걸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바꾸지 않는 것을 한 개인 혹은 한 집단의 당연한 일종의 가오고 자존심으로 여기는 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불편함을 감수해서라도 잘못된 건 바로잡는 걸 그게 파격이 아니라 보통이고 일상이 될 때까지 그래서 우리 개인부터 조용히 많은 책과 글을 섭렵하며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많은 저자들의 의견에 귀를 귀울여야 합니다. 누군가의 글을 조용히 음독하는 시간이 무척이나 그리운, 창밖에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의 분주함만큼 바빴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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