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사색
역대급 물난리에 지하철 중단에 도로 통제에 퇴근길 호러상황을 맞았던 K직장인의 기사를 읽고 분투하는 그들의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야 버스 한번 타면 10분 내로 회사에 오는 초단거리지만, 수도권 직장인 평균 통근 시간이 1시간 20분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실시간 교통상황을 보면서 이도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을, 수십번 수백번 골머리를 앓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직장인의 어쩔 수 없는 숙명에 꿋꿋하게 대처하는 결기 또한 느끼면서
최재천의 <다르면 다를수록>를 보니 스스로 세워놓은 높은 생활 수준에 맞추려 밤낮없이 일해 땔감을 버는 동물이 인간이라면 없으면 없는데로 조금 덜 먹고 덜 쓰는 동물이 바로 뱀이라더라. 객쩍게 돌아다닐 필요도 없을뿐더러 큰 뱀일수록 푸짐한 먹이 한 마리를 삼키곤 길면 몇 주씩 지긋이 한 자리에 머문다고 한다. 뱀은 느림과 절제의 미학을 아는 동물인게다. 빗속을 뚫고 어떻게든 출근하려고 부단히 애쓰는 근면 성실한 K직장인들 신세보다 훨 낫다.
언제부터인가 은근과 끈기, 말만 들어도 부담스럽다. 더욱이 갈아 만든 주스를 볼 때마다 우리네 인생 같다는 생각에 저릿함이 밀어온다. 열정과 수고 가득 온갖 과일들을 꾹꾹 눌러 담아 서슬퍼런 날이 반짝이는 믹서기에 휭 속절없이 갈아 누군가 홀라당 마셔버리면 끝 아닌가 하는 섣부른 허탈감이 생기는 건 너무 멀리 나간 과장일까. 기질적으로 책임감이 과도하고 강박적인 성향이 짙은 나로서는 이젠 살짝 거리감을 두고 싶다. 서로 간의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하는 관계, 약간의 시크함을 더해 차가움이 녹아져 있는 사이로 남고 싶다고 해야 하나.
정확한 계산은 좋은 친구를 만든다는 말처럼, 할 수만 있다면야 이 광속의 쳇바퀴 속에서 내 삶의 속도를 적절히 조절하며, 은근과 끈기를 집중할 시기 정도는 선택하고 싶다. 강신주의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에서 꽃을 그리려면 꽃과 일정 정도 거리를 둬야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잘 묘사한다는 것은 거리를 둔 다음에 그 사이를 자신의 언어로 채워 넣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생을 잘 살기 위한 지속적인 몰입도 그렇다. 조절 스위치를 켰다 컸다 하는 그 일정기간, 그 틈도 중요하다. 이건 궁극적으로 결국 인생을 어떻게 완주할 것인가란 문제로 귀결된다.
아들의 얼마 전에 바꾼 카톡 대문 사진이 오버랩된다.
"해가 져서 밤이 오고, 그리고 또 해가 떠서 아침이 오듯 슬픈 일이나 괴로운 일을 끝내기 위해 재밌는 일이 끝나는 거란다"
찾아보니 애니메이션 보노보노의 한 에피소드에서 나오는 말이다. 왜 항상 즐거운 일은 매번 반복되지 않지? 왜 끝나야 하는 걸까? 아쉽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하다. 그리고 여러 생각 끝에 세상의 모든 일은 ‘끝’이 있는 거구나란 깨달음. 주인공이 그걸 납득하게 되는 지점에서 이 대사를 읊는 것. 슬프고 괴로운 일도 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똑같이 즐거운 일도 끝이 있는 법이라고 생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 그렇기에 스위치 완급조절을 통해 안락지대를 쉬엄쉬엄 넓혀가고 불편함과 편안함을 반복하는 여정이 바로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 그나저나 중 2 아들아. 무슨 말인지 알고 바꾼 거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