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사색
100일된 대통령을 두고 말의 점령자, 회의발언 70% 독점해 참모들이 입을 막는 스타일이라는 어느 정치컨설턴트의 평가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니 70%는 그래도 양반입니다. 30프로 여지라도 있으니 비집고 들어갈 틈이라도 있지. 회의시간에 풀타임 전력질주 리더들 못보셨나봐요?‘ 열과 성을 다해 독고다이 일장연설하는 분들을 보면 예전부터 참 궁금했다. 그렇게 독주할 거면 회의나 미팅은 왜 하자고 하는 건가. 본인이 다 결정하고, 결재하면 되는데 추후 잘못되었을 때 일종의 면피성 형식적인 절차인지 뭔지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인지도 제로였던 tvn을 예능채널로 키운 나영석PD의 어느 시상식에서 밝힌 수상소감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실제 그는 회의에서 선배든 후배든 누군가의 조언을 허투루 듣지 않는다고 한다. 훌륭한 동료들이 옆에 있었고, 그들에게 묻고 일상을 나누기에 성공이 가능했다. 종합예술인 정치와 행정은 오죽하겠으며, 회사경영은 말할 것도 없겠다. 현재 우리의 삶이 tvn <지구오락실>보다 못한 건 아닌지 씁쓸함이 밀려온다.
근데 이거 알면 꽤나 자존심 상할텐데.,.공감력은 동물도 적정 부분 갖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실험용 쥐를 넣은 우리 두 개를 나란히 놓고, 한쪽 우리에는 물을 부어 쥐가 익사하기 직전까지 스트레스를 가한다고 치자. 다른 우리에 넣은 쥐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게만 한다. 그리고 나중에 스트레스성 위궤양의 유무를 조사하자 익사 직전까지 스트레스를 받은 쥐에서 당연히 위궤앙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쥐에게도 같은 병변이 나타났다는 것!
하물며 동물도 일종의 사회적 뇌를 갖고 있다는 추론을 하게 되는데, 성숙한 우리 인간은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1차원적 역량조차 갖지 못하다니. 쯧쯧. 하하키기 호세이의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견디는 힘>을 보면 공감능력도 3단계로 볼 수 있다고 한다. 2단계가 타인의 감정이나 고통을 나누는 능력이고, 3단계는 영적 공감이다. 분명한 건 셋 다 소극적 수용력이 없다면 그 자체가 일어나기 힘들다.
허공에 매달린 상태를 어떻게든 지탱하려 애쓰는 힘이 바로 소극적 수용력이다. 불확실한 상황이나 정황을 그대로 지켜보면서 놀랍고 의심스러운 상황을 견디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대상의 본질에 깊이 다가가는 방법이며, 특히 그 대상이 사람일 경우 상대방을 진심으로 배려하는 공감에 다다르는 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고 내 세계는 내가 서 있는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칼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완전 활극인, 아파트 회장 분투기를 담은 남기업의 <아파트 민주주의>를 추천한다. 저자가 동대표에 회장까지 하려고 했던 건 바로 지인의 권유, “정의를 입에 달고 살면서 자기가 사는 동네 일에는 왜 이렇게 관심이 없느냐. 나라의 변화도 가장 작은 단위인 마을이 바뀌어야 가능한 거 아니냐”
이 책은 우리 삶의 일부, 작은 나라인 공동주택 주민들의 작고 큰 단위의 공감도, 평화로운 공존도 참 어렵고 더디다는 걸 고스란히 담았다. 그만큼 누구에게나 공감과 경청은 끝내고 해치울 숙제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동사이며 평생의 과제인 거다. 에라 모르겠다. 반면교사 케이스들이야 이미 나이가 잡술만큼 잡수셨으니, 다시 태어나서 고치든지 말든지 알아서들 하시고, 한 살이라도 어린 말랑말랑한 우리들부터 늦지 않았으니 어서 사회적 뇌를 챙겨보자. 렛츠 갯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