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사색
서울시가 아이 봐주는 조부모 등 친인척에게 소정의 돌봄수당을 지급한다는 뉴스에 아이 때문에 허덕였던 예전이 문득 생각났다. 내 자기소개에 빠지지 않는 단골멘트, “출산 휴가 3개월 빼고는 쉬지 않고 일했어요. ” 와 오버랩되면서...사실 나만 쉬지 않고 일하지 않았다. 내 엄마, 내 아버지가 나와 내 남편의 역할을 대신 해주었기에 그때 그 아기는 어찌저찌해서 시크 중1이 되었다.
내 의지 50에 주어진 환경 50을 더해보니 어떻게든 살아지더라. 내가 편견없이 자랄 수 있었던 건 모두 외할머니 덕분이었다고 하는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넘사벽이고, 시크 중1은 행정복지센터의 영어강의를 매주 듣는 학구열 철철 넘치는 우리 엄마 덕분에 영어 공부에 대한 거부감이 그다지 없다.
무거운 아이를 들어 올리다 손목터널증후군, 허리디스크와 같은 손주병에 시달리면서까지 품에 늘 끼고 사셨던 그 세월에 보답이라도 하는지, 시크 중1은 주 양육자인 우리 엄마를 애미인 나보다 더 사랑한다. 며칠 후면 시아버지 팔순인데 코로나 걸려 건강이 좋지 않으시단 이야기에 나보다도 먼저 안부 전화를 드렸단다. 정말 기특하게도
우는 아이를 냉정하게 놓아두고 서울과 거제를 오고갔던 그 세월들이 켜켜이 쌓이고 누적돼 이제는 고운 결을 맞추듯 윤이 나고 반짝이게 한다. 나도 부모가 되어서야 내 부모의 고단하고 무거웠던 삶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하면 꽤나 늦은 변명일까. 그래도 꾸역꾸역 여기까지 왔으니,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됐다셈치고 매일 감사하며 살아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학기 적응에 여념없는 아들을 할머니 종일 케어에서 자립시키느라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던 몇 달 전, 오래간만에 본 무척이나 씩씩한 고교 동창. 중학교 3학년 딸과 7세 아들을 번듯하게 그 누구의 도움없이 손수 키우느라 정신없지만 차분히 묵묵하게 본인의 삶을 살아내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뭐 대단한 거 하느라 온종일 열불 나 있나. 부끄럽게도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자신과 화해한 자만이 세계에 대한 공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에릭호퍼의 말처럼 수시로 끓어오르는 분노와 상심을 누르고 한없이 모자란 날 탓하며 그래도 내 자신과 화해해야되지 별 수 있겠는가. 시크 중1보다도 못한 생물학적 나이만 성인이면 되겠는가. 진짜 품이 넓은 으른 되려면 아직 멀었다. 처음 해보는 엄마라 여러가지로 미안하다.
일단 입버릇처럼 하는 말부터 고쳐야지.
애는 잘 커? "말 안들어요. "
말 잘 들으면 얘가 아니지. 아차차 나도 말 안들었잖아.
돌이켜보면 참 어긋한 순간들이 많았고 나로 인해 부모님 속도 많이 썩어문드러졌는데, 정작 '내 아이는 그러면 안돼' 라는 시건방진 생각은 대체 뭐지? 참 내 속 편하게만 생각한다고 반성하게 된다. 요즘 부쩍 아들과 밤마다 이야기할 기회가 많은데 말할수록 갸우뚱 내 아이인가 싶다. 14년 전 내게서부터 분화되어 독립된 또 하나의 주체로 인정해나가야만 하는 시점이 드디어 도래한 거다.
이유남의 <엄마 반성문>을 보면 일단 오더보다 물음으로 이스라엘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많이 하는 말을 예로 들었는데 "마타호쉐프". 그래 너의 생각이 뭐야?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내가 산 세상보다 더 새롭고 낯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 아이에게 나의 말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도 곰곰이 생각해보면서...수학학원에서 돌아올 아이를 기다리는 중 녀석이 좋아하는 블랙핑크와 아이브 신곡을 들어본다. 근데 엄마는 빅뱅의 ‘봄여름가을겨울’ 이 더 좋아.
“아름답던 우리의 봄여름가을가을겨울 비 갠 뒤에 비애 대신 어 해피 엔드 칠색 무늬의 무지개 철없이 철 지나 철들지 못해 철부지에 철 그른지 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