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사색
“그래서 결론이 뭔가요?”
어제 만난 어느 회사 임원은 나의 첫 책 <낀세대생존법>의 결론을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결국 각자도생이죠. 본인의 나이에 맞는 마음을 덜어내면서 각자 살길을 스스로 찾는 거죠.” ‘각자도생’은 1998년 외환위기,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가장 많이 쓰인 용어였다. 2021년 출간한 내 책에서도, 2022년 이태원 참사를 겪고 있는 이 어지러운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각자도생은 생존에 있어 필수불가결의 단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살아있는 상태로 현존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산을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우리가 매순간 위험해지려고 스릴을 맛보려고 고통을 느끼려고 인생이란 산을 올라가는 건 아닐 것이다. 그냥 천천히 자연을 음미하며 뚜벅뚜벅 오르기도 하고, 정점을 찍고 홀가분한 마음에 내려가기도 하고. 그 속에서 싫든 좋든, 살아내자면 누군가를 의존하기보다는 스스로 모색해서 길을 찾아낼 수밖에 없는 시대 변화를 뒷받침하는 게 서글프고 외롭기도 하겠지만, 그걸 차치하고 일단 살아야지, 홀로 우뚝 서봐야지, 옆을 돌아보고 도움을 요청하거나 손을 내밀 수 있는 거다.
요 근래 본 책 중 최고라고 엄지척하는 최예신의 <방석 위의 열흘>, 번뇌가 끊이지 않을 때마다 이 책을 붙들겠다고 약속했다. 저자는 대기업 임원에서 일 년도 되지 않아 잘린 후 열흘 동안 전라도의 어느 명상센터에서 수행한 걸 글로 녹였다는데, 감정이입이 절로 되어 책을 집어들자마자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내가 어디에 쓰이는 사람인가, 나의 혼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 번뇌를 어떻게 소화해 흘려 보내야 하나. 저자는 그 답을 바로 ‘명상’에서 찾았다.
한 순간에 직장에서 직을 잃고,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별안간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물론 고통의 총량들을 일렬로 세우고 무게를 재고 비교할 바는 아니겠지만, 분명한 건 각자가 살면서 느끼는 이러한 강렬한 통증들은 일상의 평범한 감정들을 와르르 무너뜨린다. 그러면서 가장 무서운 건 아무 것도 시도조차 하고 싶지 않은 허무함을 맞닥들일 순간인 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명도생이라도 해야지. 구명도생, 구차스럽게 겨우 목숨만을 보전하며 부질없이 살아감을 이르는 말이다. 근데 살아가는데 구차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는가, 이 역시 생존 방법 중 하나인 것을, 일단 이 글을 쓰는 나는 이 책을 읽는 그대는 뭐라도 하는 우리는 그래도 살아있지 않은가. 그걸로 됐다. 막을 수 있었던 혼돈 속에서 안타깝게 운명을 달리한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각자도생이든 구명도생이든 괜찮아. 다 괜찮아. 도생은, 살아있으면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커다란 고통은 마주하면서 묵묵하게 담당하고 차분하게 우리의 자리를 지키며 갈등과 혼란으로 자기 자신을 갉아먹거나 남을 미워하지 말거나 자기 상황을 탓하지 말고 저자처럼 명상이든 뭐든 스스로 단련하고 승화하는 기회를 찾아볼 수 있는 것도 결국 우리가 살아있다는 흔적이고 발자취고 증거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다시 책으로 돌아가야겠다. 흔들리는 나를 다독이며, 붙잡으며 읽고 또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