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4장

논산훈련소

by 조각사

4장 논산훈련소


남자들의 술자리에서 한 번 등장하면 밤을 지새워도 끝이 나지 않는 주제, 바로 군대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나는 또래보다 조금 일찍 그 길을 택했다. 빠른 년생이었던 탓에 지원 입대를 결정했을 당시 내 나이는 고작 열아홉 살이었다.

학창 시절 공부를 일찌감치 포기했던 터라 대학 진학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내 수준에 맞는 지방 대학이라도 가길 원하셨지만, 넉넉지 않은 형편에 무리해서 대학에 갈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대학 원서를 쓸 때 나는 입영 지원서를 썼다. “어차피 다녀와야 할 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라는 생각이 컸다.


그렇게 2011년 6월, 논산훈련소에 들어섰다. 춘천 근처에 102 보충대가 있어 그곳으로 갈 줄 알았는데, 배정받은 곳은 뜻밖에도 충남 논산이었다.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한 논산으로 향하며, 나의 입대가 아버지에게는 잊고 지낸 젊은 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뜻밖의 선물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았다.

논산으로 가는 길은 유난히 뜨거웠다. 입대 일주일 전쯤 발매된 에프엑스의 핫 썸머를 들으며 훈련소로 향했다.

군대 입대곡이라 해서 입대할 때 듣은 노래는 군번처럼 평생 기억에 남는다.

나는 부모님 걱정을 덜어드리고자 “웃으면서 잘 다녀올게!”라며 씩씩하게 인사하고 들어갔다.

하지만 나중에 아버지께 전해 듣기로는, 내가 들어간 뒤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휴게소마다 차를 세우고 병원에 가야 할 정도로 통곡을 하셨다고 한다.


그 시간에 나는 낯선 사람들, 생소한 장소. 모든 것이 처음인 그곳에서 나는 나름의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군대는 ‘공동체’의 의미를 온몸으로 배우는 곳이었다.

한 명의 실수에 연대책임이 따르고, “선임이 누구냐”는 질문 뒤에는 늘 긴장이 흐르는 곳.


5주의 훈련 기간 동안 나는 생전 만져볼 일 없던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고, 땅바닥을 기며 야간 행군을 했다.

태어나 처음 마주하는 고단함 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엄마였다.

평소 당연하게 여겼던 엄마의 밥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고, 매일같이 도착하는 엄마의 편지에 목이 메었다.

누군가를 위해 매일 펜을 든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기에, 그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내한 엄마의 사랑에 깊이 감사했다.


5주간의 훈련이 끝나고 수료식 날,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또다시 눈물을 쏟으셨다.

훈련을 받느라 새까맣게 타고 꾀죄죄해진 아들의 모습이 안쓰러우셨나 보다.

면회 때는 사회 음식을 먹을 수 있었기에 미리 치킨, 피자, 햄버거 같은 자극적인 음식을 부탁드렸었다.

그런데 내 먹거리보다 엄마가 먼저 챙긴 건 내 동기들이었다.

“부대에 혹시 면회 못 오는 친구는 없니? 있으면 같이 데려오너라.” 그 마음 씀씀이를 보며 ‘나는 참 복 많은 자식이구나’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면회를 하며 자대 배치 소식을 들었다.

내가 갈 곳은 시설 좋고 복지 좋기로 소문난 ‘육군사관학교’였다.

훈련 기간 내내 엄마가 새벽 기도를 다니며 툭하면 우셨다는데, 아마 그 눈물이 하늘에 닿아 아들에게 좋은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지금은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정들었던 훈련소 동기들과 꼭 연락하자며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처음 느끼는 감정을 느꼈다.

물론 연락은 해본 적 없다.

하지만 각자의 자대로 떠날 때의 그 뭉클한 감정은 잊지 못하리라.


육사에 발을 들였을 때, 선임들은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핏덩이’ 신병이 들어왔다며 신기한 듯 구경을 왔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또 다른 인생의 시작이었다.

내가 배정받은 소대는 상병과 병장들이 가득한 이른바 ‘풀린 군번’이었다. 몇 달만 참으면 선임들이 다 전역하는 좋은 상황이었지만, 그만큼의 고충도 있었다.

게으른 상병장들 틈에서 막내인 내가 모든 궂은일을 도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한 달 차이 나는 선임 한 명이 버티고 있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사람들은 군대 하면 총 쏘고 작전하는 멋진 모습을 상상하지만, 실상은 청소와 빨래, 그리고 끝없는 ‘작업’의 연속이다. 비가 오면 배수로를 파고, 여름엔 예초기로 산을 깎듯 돌리며, 가을엔 운치 느낄 새도 없이 포대자루에 낙엽을 치우고, 겨울엔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을 새길로 만들어나간다.

군대는 말 그대로 ‘자연을 거스르는 곳’이었다.

그렇게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우고 혼나기도 많이 혼났다.

밖에서는 나름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군대에서는 왜 이리 혼날 일이 많은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되기도 했다.

그 힘든 시간을 견디게 해 준 건 동기들이었다. 선임들의 눈치와 고된 작업, 시간의 야속함 속에서 서로를 다독였던 그들은 지금까지도 연락을 이어가는 소중한 인연이 되었다.


군 생활에서 재밌는 에피소드 하나를 꼽자면

내가 상병말쯤 동기생활관이 되었는데, 전역 2개월을 앞둔 사람들이 무엇을 하겠냔 말이다.

다들 CD플레이어를 꽂고 노래를 들으며 잠을 잔 탓에 점호인데도 자고 있어서 당직사관이 찾으러 왔다는 웃픈 얘기가 있다.

당시에 당직사관 말하기를 너희들은 동기생활관 돼서 병장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고생했어서 봐준다며 뜻하지 않게 위로받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그렇게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귀한 시간을 나라에 바쳤다.

“부대를 막론하고 그 시간을 견뎌낸 모든 대한민국 남성들은 존경받아 마땅하고 고생하셨습니다 “

작가의 이전글일상 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