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군대를 남들보다 일찍 간 탓에 전역 후 내 주변엔 정작 함께 놀 친구가 없었다.
군에서 갈고닦은 각 잡힌 생활력으로 사회를 멋지게 살아낼 줄 알았건만, 현실의 나는 금세 학창 시절의 게으른 모습으로 회귀해버렸다.
탁구장과 헬스장을 전전하며 야심 차게 사회 복귀를 준비했던 '군인'은 어디 가고, 어느새 거울 앞에는 다시 살집이 오른 백수 한 명만 서 있었다.
어머니의 걱정 섞인 한마디가 가슴에 박혔다.
"학교라도 가든,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니?"
친구도 없는 적적한 일상에서 학교는 달콤한 도피처처럼 보였다.
공부에 뜻이 있었다기보다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다.
하지만 결국 발길이 닿은 곳은 학교가 아닌, 새벽 공기가 서늘한 인력소였다.
먼지 묻은 군화를 다시 꺼내 신고 집 앞 인력소로 향했다. 어스름한 새벽, 수많은 아저씨가 자판기 커피 한 잔에 몸을 녹이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앳된 얼굴의 나는 단번에 시선을 끌었다.
"너, 미성년자 아니냐?"
소장님의 농담에 아저씨들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 나를 데려가겠다며 농을 던지는 그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나의 첫 '노가다'가 시작되었다.
첫 현장은 아파트 보도블럭 공사장이었다. TV에서나 보던 보도블럭을 끝없이 쌓고 옮기는 단순 반복의 연속.
허리는 끊어질 듯 비명을 질렀다.
새참 시간에는 입맛조차 없어 바닥에 누워 쪽잠을 자는 게 유일한 휴식이었다.
하루가 끝나고 수수료와 차비를 떼고 받은 손때 묻은 10만 원.
내일은 도저히 못 오겠다는 고통과, 이 돈이면 주말 술값은 충분하다는 안도감이 교차했다.
몸이 학창시절 아르바이트로부터 기억하는 성실함 덕분이었을까. 현장에서 좋게 봐주신 덕분에 인력소를 거치지 않고 직원처럼 매일 출근하게 되었다.
(수수료와 차비를 굳힐수 있다)
현장아저씨들이 칭찬해주시니 힘들어도 일 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첫 주급을 받았을 때, 나는 부모님께 내복을 사드렸다.
그 시절엔 첫 월급으로 내복을 사드리는 게 당연한 관례 같은 것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건 참 잘한 일이었다.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 웃음꽃을 피우던 그 순간의 행복은 돈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그 시절만 줄수 있는 한정판 행복이었다.
혹시 지금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부모님께 마음을 전해보길 권한다.
그 뿌듯함은 평생을 버티게 하는 기억의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보도블럭 현장이 끝난 뒤, 마침 나와 비슷한 시기에 친구를 따라 시작한 페인트 일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새벽부터 신나 통과 페인트 통 수십 개를 옮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도로 위 정지선, 건널목, 장애인 주차 구역...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길 위의 모든 선과 그림이 사람의 손끝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도록 유리알을 뿌려 마무리하던 내 모습이 기억난다.
보조여서 일이 쉽다고 손에 익었다고 해서 결코 허투루 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성실함이라기보다 '간절함'에 가까웠다. '여기서마저 밀려나면 나는 또다시 갈 곳을 잃고 헤매야 한다'는 불안감이 나를 더 단단하게 채찍질했다.
그렇게 나의 20대 초반은 여러 현장을 다니며 일년의 시간동안 차가운 새벽 공기와 뜨거운 땀방울, 그리고 길 위에 그려 넣은 하얀 선들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물론 이것으로 나의 현장은 끝이 아니었다.
이 후에 공장도 다니고 전기자격증 이 후 이야기는 뒤 쪽에서 다루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