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쥬라호행 완행 열치
(산적님이 만들어 주신 인도 사진 모음입니다)
투숙했던 SAGAR HOTEL에서 불과 10분도 안 걸리던 오르챠 기차역. 공사중인지 주변이 어수선하고 문마저 닫혀 있던 조그만 간이역이었다. 택시 기사가 우릴 앞서가더니 닫혀 있던 철창 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대합실이 나타났다.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과 바깥의 찬기운이 몰려들자 놀랍게도 바닥에서 여기저기 사람들이
움직였다. 족히 이,삼십명쯤 되는 사람들이 인도 특유의 모습으로 천을 뒤집어 쓰고 대합실 찬 시멘트 바닥에서 자고 있었던 것. 대합실이나 마나 5평 될까말까한 좁은 공간이었는데 다닥다닥 붙어서~
그걸 본 순간, 안 그래도 작은 내 뱁새눈이 똥그랗게 커 지는 사이, 이내 불이 켜졌고 택시 기사는 그곳을 거쳐서 대합실 옆문을 두드렸다. 곧 바로 문이 열리고 불이 켜지자 기사 뒤를 따라 들어가보니, 역장인 듯한 사람이 자다가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머리를 매만지고 옷매무새를 추스리며 우릴 맞이했다. 오르차 역장실이었던 것. 우습게도 그곳은 우리나라 6,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관공서 벽면 중앙에 걸려 있듯이,
마하트마 간디의 초상화가 꼭 그렇게 벽 중앙에 걸려 있었다. 흑색 다이얼 전화기가 놓여 있었고 구형 영문
타자기와 삑삑 소리를 내는 초기 아날로그형 구식 프린터가 놓여 있었다. 그 역장실 역시 좁아 터지긴
마찬가지. 3평 정도 되는 공간이었는데 영락없이 우리나라 과거 유물이 모인 소형 창고 같았다.
우린 한참을 서서 기다린 끝에 카쥬라호행 열차표를 끊을 수 있었다. 사가르 호텔 주인이 우릴 위해 택시 기사에게 부탁해 놓은 듯 그 기사 덕에 일사천리로 표를 끊은 우린 그 기사와 헤어져 플랫폼으로 나섰다. 역장실 문 바깥이 바로 플랫폼이었는데 맞은 편 철로변은 공사중이었다. 하루에 한두번 기차가 설까말까한 조그만
간이역의 플랫폼엔 인도 특유의 모습인 개들이 어슬렁거렸고, 까무잡잡한 인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러 보니, 철로변에 목 없는 개의 사체 한구가 널부러져 있었다. 아마 기차에 치이며
목이 잘려 나가 버린 모양. 그 옆에선 죽은 개의 새끼인 듯한 누런색 어린 강아지가 배회하고 있었다.
7시 반 출발 기차라 여유로운 시간, 오르차역의 발전을 위한 건지, 죽은 개의 영혼을 달래려는 건지 이른 아침인데도 산적, 느닷없이 삼뽀냐 연주를 했다. 딱 두곡 불었지만~ 그러다 만난 프랑스인 부부, 홈스테이 여정으로 인도 오지 만을 찾아 여행 다니고 있다던 부부. 우리 나이 또래인 듯한 그 부부와 우린 구면인 듯 스스럼
없이 대화를 나눴다. 얼마 후 사람들이 한쪽으로 몰려가며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곧 이어 기차가
도착했는데 탈 수 있는 객차 겨우 3칸 뿐이었다. 다른 객차들은 안으로 문을 잠가 버렸었고.
우린 필사적으로 꾸역꾸역 객차 안으로 몸을 디밀어 탔는데 흐미~~ 열차 안은 영락없는 아우슈비츠행 열차 같았다. 까무잡잡한 인도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빼꼭히 겹쳐져 타고 있었던 것. 통로를 차지한 짐들 위에도, 좌석에도, 이층 침대칸에도 짐 반, 사람 반이었다. 아우슈비츠행 열차와 다른 건, 사람들이 모두 미소를
띠며 즐거워하고 있었다는 것. 3명이 정수인 좌석엔 6명이 앉아 있었는데 더 좁히고 좁히며 나를 끼워 앉게 해주었다. 내 엉덩이가 의자에 걸쳐진 면적은 겨우 내 양손바닥 크기만 했다. 그런데도 완전히 막혔다 싶은
좁디 좁은 통로를 오가며 어느 비쩍 마른 인도 여인이 '촐리'를 팔러 다니고 있었다. 콩, 도마토, 고추, 양파
등등 야채 예닐곱 가지를 섞어 버무린 인도 고유의 음식인 촐리. 사람들은 10루피에 그걸 즐겨 사 먹었고
우리에게도 덜어 주어 먹어 봤더니 그런대로 먹을만 했다. 유일하던 외국인인 우리를 사람들은 웃고
떠들어대며 온화한 미소로 지켜보았다.
승객은 대부분 가족 단위였다. 실린 짐들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시골 지역일수록 짐들을 바리바리 가지고
다녔는데 그 열차는 말 그대로 콩나물 시루 같이 오지 만을 다니는 완행 열차인 듯 싶었다. 그 비좁은 틈에서도 산적은 연주를 해서 이목집중을 받았고, 사람들은 동물원 원숭이 바라보듯 지켜보며 즐거워했다. 어딜
가도 너스레 잘 떠는 산적, "에끄, 도, 띤, 짜르, 빤쓰, 체흐, 싸뜨, 아뜨~" 하며 손가락 제스처로 힌디어 숫자를 세어보이자 사람들은 즐거워하며 우리에게 '라흐마(남자)' 와 '라흐니(여자)' 라는 단어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렇게 완행 열차는 190Km를 달리고 달렸다. 워낙 혼잡해서 프랑스인 부부가 열차에 탔는지 여부도 우린
몰랐었다. 열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사이, 담배 피우러 밖에 나갔던 산적은 프랑스인 부부 남편을 만나
맞담배를 피우고 들어오기도 했다. 6시간 남짓 달려, 오후 1시 40분경 드디어 카쥬라호에 도착했다. 인도
여행에서 굳이 카쥬라호 행을 택했던 것은 그곳에 살고 있다던 25살 청년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우리나라 6,70년대의 야학 같은 학교를 운영한다던 청년. 가난해서 예닐곱 살만 되면 도시로 팔려나가는 아이들을
보다 못해 부모를 설득하고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고 있다던 청년.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남편은 그 청년이 운영한다던 야학의 실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했다.
카쥬라호 역에 내린 우리는 어느 남자에게 부탁해 그 청년과 통화했다. 문제는 수업중이라 못 나온다며 기다리라고 했던 것. 역에 내렸던 승객들은 이미 어디론가 다 사라진 뒤였고, 외국인은 우리뿐이라 릭샤꾼들은
계속 치근덕댔다. 몇 시간을 기다릴지도 모르는데 설상가상 날씨마저 더웠다. 고국(한국)에서는 18, 19, 20일 구정 연휴를 맞아 맛난 음식이 즐비할텐데, 우린 고작 30루피짜리 빵 몇쪽으로 배를 채우고 있었으니~
답답해진 울 산적, 딴 남자에게 부탁해 그 청년에게 우리 사정을 이야기해 달라 했다. 헌데, 그 남자가 청년과 통화하더니 우리에게 딱 달라붙어 자기와 함께 가자고 졸랐다. 슬슬 불안하고 초조해진 산적, 묘책으로
괄리오르에서 우릴 기다린다던, 6번째 호스트가 될 아가씨와 통화했다. 울 산적의 영어 실력으론 세세부분
까지 설명 못하겠으니 좀 도와 달라고~ 같은 인도 사람이니까~
여차저차 그 청년의 동생이 우릴 마중 나오게 되어 그 집에 도착했는데,
다음에...
삼뽀냐 부는 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