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쥬라호의 실상
https://www.youtube.com/watch?v=v4D_JTINmPQ
산적님이 만들어준 인도 사진 모음입니다.
밀 밭 가운데 있던 시멘트 건물이었다. 3칸이었는데 칸막이 문도 없었고, 가구 하나 없이 더블 나무 침대 하나만이 덜렁 놓여 있었다. 부엌으로 쓰는 칸엔 수도 꼭지는 있는데 물도 나오지 않았고 화장실도 없었다.
편히 쉬기는 그른 숙소였다. 인도 도착한 이래 먹는 걸 극도로 자제했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곤욕을 치를 숙소였다.
더우기, 저녁 6시경에서야 일을 끝내고 돌아온 청년은 저녁 식사는 자기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해결하자고 했다. 여차저차 청년의 친구 형제가 운영하던 골동품 가게에 들르기도, 지은 지 100년 됐다던 그의 부모님 댁에 들르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 10시 넘어서야 결혼식장으로 갔다. 야외에 차려진 예식장이었는데 돈푼 께나 있는 듯 넓고 휘황찬란했다. 우린 거기서 함께 갔던 청년의 친구들과 잘 차려진 인도의 진기한
뷔페식 요리를 맛 볼 수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서도 나는 맘껏 먹을 수 없었는데, 화장실도 없는 숙소에서 자야한다는 강박관념이 머리 속을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배를 채운 우린 그 예식장의 유일한 외국인으로서 귀빈 대접을 받으며 이목집중을 받았다. 산적의 삼뽀냐
연주는 하객들에게 기쁨을 선사해 주었는데, 그 신랑 신부의 동영상엔 아마 우리가 영원히 살아 있을 것 같다. 우릴 계속 찍어댔으니까~ 크크크
그곳 예식은 자정(밤 12시)에 시작 된다 해서 우린 청년이 빌려타고 온 오토바이 뒤에 함께 동승하여 11시경 숙소로 돌아왔다. 자기는 오토바이를 돌려주러 갈테니 잘 자라던 청년과 헤어진 우리는 우리나라 도마뱀의 1.5배 크기인 인도 도마뱀이 여기저기 기어다니던 숙소에서 14일째의 잠을 청했다. 바람소리조차 없이 조용하기만 하던 밀 밭 속의 숙소. 밤 내내 내가 뒤척일 때마다 자던 나무 침대의 삐걱거리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던 우린 오줌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다가 새벽녘에 함께 밖으로 나섰다. 집 가까운 풀섶에 소변을 보고 일어서니 어찌나 밤하늘의 별들이 초롱초롱하던지~ 북두칠성과 카시오페라좌도 보였고, 은하수도 보였다. 인도의 밤하늘 역시 우리나라의 밤하늘과 똑 같았다.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 만이 다를 뿐이었다.
그새 날은 밝아 2월 20일 여행 보름째를 맞이했다. 어느새 인도 맛에 적응된 우리의 혀는 짜이 한잔을 맛있게 삼켰고, 전날 얘기 됐던 청년의 야학을 둘러보기로 했다. 밀 밭 옆으로 넓은 공터가 펼쳐져 있었고, 키 낮은 풀들이 자라고 있던 곳을 거쳐 청년과 우린 그의 학교로 걸어갔다. 남녀 교합상으로 유명한 사원이 바로 보이던 그곳엔 인도식 주택들도 많이 보였다. 쓰레기를 뒤지던 돼지도 보이고, 작두샘 가에서 빨래하던 여인네도
보였다.
드디어 25살 청년이 운영한다던 초등 과정의 야학은 흙먼지 뒹굴던 시멘트 바닥의 앉은뱅이 책상 앞에 꿇어 앉아 공부하고 있던 아이들과 교실이라 해 봤자, 5평 남짓한 두 칸과 변소로 사용되던 조그만 공간뿐이었다. 변소 옆으론 몇개의 계단이 있었고, 그 위는 학생들이 모이는 옥상인 듯 했다.
아가씨인 듯한 여선생님 두분이 각기 다른 교실에서 십여명씩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청년에게 들은 바로는 현재 학생수 60명인데 새학기엔 100명 으로 늘어난다고 했다. 모두 가난한 집 아이들이라 거의 무료로 가르치다보니 전기세도 밀려 단전됐노라 했다. 여선생님의 월급도 못 주고 있노라며 간절히 도움을 바라던 청년. 더욱 안타까웠던 건, 내 목에 걸고다니던 볼펜을 바라보던 여선생님 한분, 그걸 자기에게 주면 너무 고맙겠노라 했다. 즉석에서 내 핸드백에 꽂혀 있던 볼펜을 드렸다. 아이들 역시 한결같이 내 볼펜에 눈독을 들이며 간절히 원했었다. 카쥬라호 길거리에서 만났던 학생들마다 그랬었다. 심지어 제복을 입은 고등학생마저도 내 볼펜을 달라고 했었다. 한국에서 가져갔던 100여 자루의 볼펜은 이미 전날 청년에게 줘버리고 없던 터였고 여행 관련 메모를 위해 끝까지 가지고 다녀야했던 볼펜 뿐이었다.
더욱 안타까웠던 건, 사원을 구경하라며 우리에게 자유시간을 주었던 청년과 잠시 헤어져 상시 개방 돼 있던 조그만 사원 앞에서 마주쳤던 카메라맨이었다. 카맨은 내 목에 걸려있던 볼펜을 가리키며 그걸 자기에게 주면 자기는 너무너무 행복하겠노라 했다. 정말 미안했지만 한자루뿐이라 주지 못 했다. 마주치던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모두 그러는 걸 보면, 카쥬라호엔 학용품이 없거나 설령 있다 해도 아주 비싼 모양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마저도 한자루의 볼펜이 그토록 간절했으니 더 무얼 말하리~
학자재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던 교실과 닳아 문드러진 백묵, 칠판닦이, 문짝도 없이 교실 바로 옆에 붙어있던 비위생적인 화장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티없이 밝고 맑고 명랑했다. 산적이 불러주는 삼뽀냐 연주 땐 ㄷ자형 옥상에 올라가 줄줄이 우릴 내려다 보던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카메라맨 청년에게 큰 빚을 진 것 같은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내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죄의식일 것 같다.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며 야학 밖으로 나오자, 우리를 자기 집으로 안내하던 어느 십대 소년. 그 집에 들어가보니,
다음에...
결혼식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