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고 검은 방안 안에 한 연극배우가 대사를 읊조리고 있었다. 그 배우의 머리 위로 작은 핀 조명이 하나 켜져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그 밝음에 집중하게 되고 배우의 입 모양과 표정을 살폈다. 실 줄기처럼 가느다란 연한 흰색의 연기가 중력을 거스르며 파르르 떠는 먼지와 함께 배우 주변을 병풍처럼 감쌌다. 마른침을 삼키는 관객들, 모두 연극 무대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한 사람만은 고개를 아래로 살짝 내리고 있었다. 어깨도 들썩이지 않았고 훌쩍이지도 않았지만 굵은 눈물 줄기가 뺨을 타고 턱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우울증으로 삶이 피폐해진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사는 40대의 짱실씨, 배우의 대사 한마디에 감추었던 설움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눈물을 말렸다.
나는 우울증이 심했을 때 영화, 연극, 뮤지컬, 각종 공연을 보면 혼자 소리죽여 울곤 했다.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웃고 즐길 때도 외롭고 고독해서 울었다. 즐겁게 즐기지 못하는 실패자라서 울었다. 저들의 삶과 같이 어울릴 수 없이 겉도는 내가 비참해서 울었다. 군중 속의 고독처럼 사람들이 많을수록 더욱 처절하게 외로웠다. 몸은 함께 있지만 그들과 섞일 수 없는 이방인임을 절실하게 실감했다. 존재 자체가 실패라고 생각했다. 빨리 소멸하여 사라지고 싶은 맘뿐이었다.
작은 성공이라도 하면 그저 본전이었다. 뭘 어떻게 해왔든 칭찬받는 삶은 아니었기에 셀프칭찬은 언감생심이었다. 어떤 연유로 실수라도 하면 엄격하게 나를 타박했다. 내가 실패자라서 실패하는 거로 생각했다. 잘 나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았다. 될 대로 되라고 너저분하게 아무것도 안 하기도 했다. 목표는 항상 높게 잡았고 실수는 감추고 싶었다. 그 와중에도 꼴에 완벽함을 추구했다. 티끌 하나의 실수에도 목을 조르는 넥타이처럼 숨이 막히게 굴었다.
우리 한국 사회는 실패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시선으로 대하는 것 같다. 실패하면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실패자라는 타이틀을 짊어지게 한다. 원스트라이크 아웃 사회다.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정신이 나약한 사람들이나 걸린다고 생각하니 우울한 사람들은 더 기가 죽는다. 그러니 실패를 자꾸 숨기려 한다. 우울할수록 남들 눈에 보기 좋아 보이는 것만 내놓으려 한다. SNS에는 자신을 더욱더 극적으로 멋지게 포장한다. 칭찬보다 비난이 익숙할수록 실패 경험을 섣불리 내놓지 않는다. 우리는 실패에서 공감을 얻는데 말이다. 그러니 카이스트에서 열린 실패 주간 행사를 다룬 신문 기사에 눈이 번쩍 뜨였다. 자신의 실패를 당당히 드러내는 행사는 2주 정도 진행되었다. 실패의 순간을 담은 사진 전시전에 이어 ‘망한 과제 자랑대회’도 열었다고 한다. 타인의 실패는 곧 자신의 실패 경험과 닮았다. 타인의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고, 삶의 지혜도 얻고, 공감하고, 도전자만 누릴 수 있는 영광의 흔적에 경의를 표할 수 있다. 실패를 공개했는데 오히려 삶의 의지와 희망을 느낀다. 실패를 내어놓으면 수많은 실패 공감러들의 마음을 열 수 있다. 자신의 실패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다른 사람의 태도를 통해 진지한 생각의 문을 열게 된다.
인생은 진행형이기에 실패에서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니라 계속 앞으로 가봐야 한다. 일론 머스크도 야심하게 쏘아 올린 우주선 스타십의 두 번째 발사에 실패했다. 그는 소셜미디어에서 "스페이스X 팀, 축하합니다."라고 남겼다. 발사 8분 만에 공중 폭발한 모습을 지켜본 그는 오히려 자신의 두 번째 도전을 축하했다. 아무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도전하는 그의 성공과정은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었다. 실패학 전문가인 하타무라 요타로 도쿄대 교수는 “실패는 숨길수록 병이 되고 드러낼수록 성공이 된다”라고 역설했다. 또 실패를 줄이기 위한 팁으로 생각 노트를 만들어 생각의 전개도를 그려보라고 말했다. 가상의 시나리오를 통해 상상 체험을 해보고 다양한 실패 가능성에 대응하라고 했다. 부분으로는 성공이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성공이 아닐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처음부터 실패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내가 해야 하는 모든 일을 실수 없이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하고 있었을까? 실패는 남의 탓이라고 생각했던 자만심이 아닐까?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은 남의 시선을 의식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난 도대체 누구를 위해 성공하려 하는가? 왜 아무도 삶의 대부분은 성공도 실패도 아니고 오히려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다고 알려주지 않았을까? 수많은 실패도 성공해야 덩달아 빛을 보게 되는 것일까? 실패한다고 괜찮다고 위로해주는 것이 아니라 실패는 원래 당연한 거니까 그냥 받아들이면 안 될까? 실패도 성공도 뭐든 결론 안 나는 인생에서 왜 그리 동요되는 것일까?저 멀리 우주에서 바라본다면 내가 실패라고 생각했던 게 정말 실패일까? 그저 흐르는 강물처럼 내가 주도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중에 만날 수 있는 선물 같은 즐거움이 될 순 없을까? 실수하면 눈치를 보면서 그것을 실패라고 자신을 고문하지 않고, 나 잘살고 있는 증거라고 즐겁게 드러낼 수 없을까?
돌이 지난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려고 주변의 물건을 잡고 일어서서 걸어보려 하다가 넘어지면 왜 잘 걷지 못하냐고 다그치고 윽박지르는 부모가 있을까? 한술 더 떠서 달리기하라고 재촉하기도 할까? 부모들은 서서히 변화되는 그 과정을 행복하게 즐긴다. 또한 반드시 걸으리라는 믿음이 확고하다. 아이가 엉덩방아를 찧어도 귀엽고 사랑스럽게 웃어주니 아이는 걸음마 연습을 멈추지 않는다. 혼자 걷게 될 때쯤 이런 과정이 행복한 추억이 될 테니,
나는 어차피 이루게 되어 있다. 그 과정을 아기를 사랑으로 지켜보는 부모처럼 나를 대하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뭔가를 했다는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설사 돈이 되지 않는 일이었고, 돈을 벌 수도 없었고, 사기까지 당해도 말이다. 우울증이 심한 사람일수록 나는 아기와 같다고 생각한다. 아직 내 인생이 서툰 아기처럼 말이다. 실패니, 성공이니 편을 가르지 말고 그냥 뭔가를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칭찬받아야 한다. 우울증의 터널을 건너 나오는데도 보통 일이 아닌데 그 와중에 뭔가를 해본다는 건 얼마나 스스로 대견한 일인가? 도전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남의 실패에 관심이 많은 법이다. ‘아기처럼 시작하는 나’와 ‘부모처럼 지켜봐 주는 나’를 양손에 잡고서 앞으로 천천히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