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도 공짜가 아니다.
‘필록세라’는 진딧물의 일종인 해충이다. 이 무서운 해충은 포도나무를 전멸시킨다. 와인이라면 껌뻑 죽는 19세기 유럽 사람들에게 이 해충은 와인업계를 벌벌 떨게 했다. 와인을 사랑하는 유럽사람들은 포도농사를 중시하기에 필록세라를 없애려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해충을 박멸하는 방법을 전혀 찾지 못했다고 한다. 포도 농사를 짓던 어떤 지역은 이 해충 때문에 포도나무 씨를 다 말려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지독하고 무서운 번식능력을 가졌다. 이런 필록세라라도 기를 못 피는 지역이 있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무시무시한 조건이기에 이 지독한 해충이 기를 못 펼까?
아주 건조하고, 매우 덥고, 무척 추우면 된다. 햇빛을 피할 곳이 없는 해발 고도 평균 700m 이상의 평야지대에 한여름엔 45도까지 치솟아야 한다. 게다가 우리나라 강우량이 평균 1200mm임에 비해 연간 강우량도 300~400mm로 매우 적어 겨우 사막화를 면한 정도여야 한다. 이런 기후 조건이면 독한 필록세라도 기를 못 편다. 과연 이 지역은 어디일까?
바로 돈키호테의 고장 라만차라는 곳이다. 가혹한 환경 조건 때문에 일반 식물들은 살수조차 없었다. 유일하게 재배할 수 있는 것이 포도나무가 유일했는데 포도나무계의 흑사병이라 불린 필록세라도 힘을 쓰지 못했다. 유럽 전역이 흑사병으로 인해 포도나무가 죽어나갈 때 라만차의 농부들만 포도 농사에 집중했었다. 덕분에 유럽 사람들은 와인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몸값이 귀해진 와인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만약 가혹한 환경이라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애초부터 포기했다면 어땠을까? 포도나무가 유일한 재배작물인데도 불구하고 필록세라가 두려워 농사를 포기했다면 어땠을까?
비옥한 환경이라면 해충한테도 비옥할 것이다. 고통이라 생각한 가혹한 환경이 오히려 필록세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독보적인 와인을 생산할 수 있게 되고 라만챠 와인의 가치를 높였다. 가혹한 환경이 독이 아닌 오히려 기회가 됐다. 와인이 흔할 때는 라만차 와인은 그저 저렴한 와인 중 하나였다. 모든 것이 엎어지고 고통스러울 때 살아남자 유럽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었다. 나에게는 어떤 가혹한 환경이 있을까? 그 가혹한 환경은 나에게 어떤 약이 되고 기회가 될까? 고통 속에서도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오히려 가혹한 환경이 주는 고통은 공짜가 아니지 싶었다.
여성학자 수전 웬델은 <거부당한 몸>에서 “고통이 우리의 삶에 대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줄 수 있고, 고통에 감사하게끔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라고 썼다. 부처 또한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는 인생이 너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화와 철학, 심리학과 신학까지 공부한 로스코도 “희열을 느낄 정도로 비극적인 경험만이 예술의 원천”이라고 했다.
고통은 아무에게나 성장과 발전의 기회를 주진 않을 것이다. 고통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자신을 자책하는 도구로 쓴다면 말이다. 딱딱한 껍집을 깨부수는 고통스러운 노력을 해야 게는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다. 고통도 공짜가 아니다. 고통이 공짜가 아닌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통은 나만의 강점과 능력을 발견하게 한다. 라만챠의 가혹한 환경이 오히려 강점이 되어 해충이 살지 못해서 포도농사가 풍년이 된 것처럼 말이다. 비옥한 환경에서는 누구나 농사를 잘 짓는다. 하지만 가혹한 환경에서도 농사를 잘 짓는 것은 다른 사람과 다른 강점과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둘째, 고통 뒤엔 쾌락이 준비되어 있다. 우리 몸은 고통과 쾌락을 적절히 균형감 있게 유지하려 한다. 지금 고통을 겪는다면 고통의 양만큼 쾌락이 준비되어 있다는 뜻이다. 헬스나 마라톤처럼 운동을 하게 되면 처음에는 힘들고 괴롭다. 정해진 목표만큼 육체의 고통을 참게 되면 오히려 상쾌하고 즐거운 행복 호르몬이 뇌에서 분비된다. 해냈다는 성취감도 느낀다.
셋째, 고통이란 정의하기 나름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다. 세상 일의 좋고 나쁨은 예측할 수 없으니 당장의 좋은 일에 너무 기뻐하지도 말고 나쁜 일에도 너무 슬퍼만 하지 말라는 얘기다. 지금 당장의 고통에 매몰되어 뒤에 펼쳐진 이야기를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목적지로 주행할 때 방지턱에서 잠깐 속도를 늦추긴 해도 그대로 정지하지는 않는다. 천천히 라도 앞으로 가다 보면 결국 목적지가 나온다. 고통도 결국 지나가는 과객일 뿐이다. 과객이 지나갈 때는 시원하게 보내주면 된다.
그러니 고통도 공짜가 아니다.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힘든 과정을 겪어야 한다. 고통의 뒷모습은 행복이다. 앞만 보고 뒤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단순하면서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우울증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면 이 또한 세상이 당신에게 공짜로 준 것이 아닐 것이다. 고통의 시간만큼 행복한 시간이 온다. 모든 것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으면 세상은 내 편이 되어 돌아간다. 고통은 쓰나 그 열매는 달다. 노페인 노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