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이 진짜 가난이 뭔지 알려준다.
효과 빠른 도파민 보급제로 넥플릭스를 가끔 이용한다. 구독만 하면 언제든 일상생활의 샛길로 빠지게 도와준다. “어서 와 이런 세계는 첨이지?” 하며 서로 내 손을 잡아 끈다. 관심 있게 본 “유쾌한 왕따”라는 웹툰을 통해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영화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파트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생각을 용기 있게 외친 박보영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주인공인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로 또 한 번 자신을 만나보라 했다.
잠깐만 보고 일찍 자려고 했는데 그만 새벽 1시가 넘어가 버렸다. 중간중간 흐르는 눈물 때문에 코가 막혀서 자리에 몇 번을 일어나 앉았다. 한쪽씩 코가 막힐 때마다 번갈아가며 누웠다가 입으로 숨을 쉬었다 했다. 박보영의 극 중 직업은 정신과 병동 간호사다. 정신과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녀가 우울증에 걸린 것이다. 예전의 우울했던 내 모습이 생각나 눈물이 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울증에 걸린 그녀가 이상하게 부러워서 서러웠다.
우울증은 누구나 올 수 있다. 남녀노소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공평할 수 있다. 그러나 우울증이 왔을 때의 상황은 다르다. 우울증 환자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어쩌면 우울증보다 주변의 환경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울증도 빈부격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울한 것도 힘든데 내가 진짜 가난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 상처가 아닐까 싶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가난이 있지만 진짜 가난은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우울했을 때 아래의 3가지가 없는 빈자였다.
첫째, 우울증을 이해하는 주변 사람들이 있는가?
박보영은 우울증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정신과 병동 간호사임에도 막상 자신이 우울증 환자가 되니 죽을 만큼 힘들어했다. 지식으로 아는 것과 직접 겪어보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다. 박보영의 절친은 우울증은 몰랐지만 친구가 우울증으로 힘들어 하자 도움이 되고 싶어 했다. 그는 우울증에 대해 알아보고 무지해서 저지른 행동에 대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녀를 좋아했던 항문과 의사는 그녀가 잘 치료받기를 원했고 그녀의 세로토론이라는 행복호르몬 분비를 위해 피곤한 몸이지만 매일 일찍 일어나 그녀와 아침 산책을 했다.
내가 우울증으로 힘들었을 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울밍아웃(우울증 고백)을 했을 때, 남편은 마치 나를 군대 고문관처럼 쳐다보면서 나약한 인간들이나 한가하게 걸린다고 했다. 징징 거리는 것을 무엇보다 못 견뎌했다. 자기 자식에게도 보채면 짜증을 내고 성질을 내는 사람이었다. ‘뭐 저러다 말겠지’ 하면서 술 먹으러 다니느라 바빴다. 시어머니는 ‘응, 그러냐?’하고는 한 귀로 흘리셨고, 시누이들은 감사할 줄 몰라서 그렇다는 둥, 먹고살기 힘들면 그런 생각을 하겠냐면서 은근히 타박했다. 약해빠진 정신머리를 가진 만만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원해서 우울증에 걸린 것도 아닌데 남편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말을 듣지 않는 피곤하고 무거운 몸뚱이로는 화수분 같은 집안일이 감당이 되지 않았다. 직장을 갔다 오면 쓰러지고 싶은데 아이들과 놀아줘야 하고 티도 안 나는 데다가 금세 어질러지는 집안꼴에 숨이 찼다. 무기력과 극심한 피로감에 이불속에서 꼼짝을 못 하고 있으면 퇴근한 남편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쯧쯧, 게을러 빠져 가지고.”라고 말하면서 방문을 확 닫았다. 그런 모습이 서러워서 이불속에서 한참을 울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근면성실한 사람이었다. 나는 12년 개근상을 받은 사람이었다. 우울증에 걸렸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애썼다. 남편은 내가 가진 좋은 모습보다 이불속에 드러누운 내 모습만으로 게으르다고 폄하하고 자기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불평불만을 해대고 시가에서 나보고 살림을 못하는 여자라고 타박했다.
만약 우울증이 뭔지 알아보려고 애쓴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내 주변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공부해 보니까 우울증이 이렇게 심각하고 아픈 병인줄 몰랐어. 내가 아는 누구도 약을 먹는대. 드러내놓지 못해서 그렇지 은근히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워킹맘으로 일하랴, 육아하랴, 살림하랴 정신이 하나도 없지? 기력도 없는데 집안일은 그냥 대충 해, 아니 안 해도 돼. 애들한테 너무 희생하지 말고, 발 동동 구르며 살지 마. 힘들면 직장도 잠시 쉬어보는 게 어때? 맘이 편했으면 좋겠어. 걱정할 수 있는 것들은 내가 다 치워버리도록 해볼게.”
나에게 이런 다정한 대화를 들려줄 사람은 없었다. 남편은 행여나 내가 집안일과 육아를 게으르게 할까 봐 감시했었고 용기 내어 말해봤자 아무도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쉽게도 내가 나를 치유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지도 몰랐고 그렇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둘째, 끝까지 관심을 가지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
극 중 박보영이 며칠 내내 잠만 자고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았을 때 엄마는 세일하는 고기가 아닌 정가의 싱싱한 고기와 야채로 음식을 했다. 직장 동료들은 그녀의 일을 대신 도맡아서 해주었다. 병원은 정신과 병력이 있는 간호사의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들에게 맞서 좋은 간호사인 박보영을 지켰다. 항문과 의사는 전 정류장에서 미리 버스를 타고 그녀가 앉을자리를 대신 앉아서는 그녀가 타면 앉고 갈 수 있게 배려했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안 그래도 우울증은 극심한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데 무관심과 방치 혹은 비난과 멸시는 철저히 혼자 고립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극 중 박보영이 밥도 안 먹고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은 비난을 하기는커녕 걱정하고 힘을 합쳐 울타리가 되어 주고 지켜주려고 했다. 결코 혼자 방치해두지 않았다. 이러니 내가 진심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한 번쯤은 영혼이 없더라도 걱정해 주는 말을 해줄 순 있지만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지속적으로 응원해 주기는 쉽지 않다. 우울증의 터널은 꽤나 깊고 길기 때문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성격 급하고 빠른 결론을 원하는 사회에서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루한 긴 여정에 함께 하지 못한다. 빨리 괜찮아지라고 다그친다. 내가 내 페이스에 맞게 스스로 응원하는 법을 알아야 했다.
셋째, 성장과 변화를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는가?
우울증의 터널에 갇혀버리면 스스로가 침체되는 기분이 든다. 무기력해져서 세상에 둔감해진다. 불에 구우면 계속 안으로 말려들어가는 마른오징어처럼 내 안으로만 계속 오그라진다. 극 중 박보영의 절친은 집에만 있는 그녀를 오토바이에 태워 바깥 구경을 시켜주려고 했고, 항문과 의사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박보영이를 억지로 산책시켰다. 그녀의 변화와 성장을 위해 애썼던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 그 모습에 부러워 눈물이 났다. 남편이라고는 퇴근 후 고작 하는 행동이 직장 상사처럼 집안을 둘러보고 맘에 안 든다고 신경질을 내는 것이 다였다.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은 일부러 되지도 않는 싸움을 걸어 술 먹을 구실을 만들어서 밖으로 나갔다.
내가 성장하고 변화하길 바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파출부처럼 집안일이나 하고 애나 키우고 돈도 벌면서 다람쥐처럼 쳇바퀴만 돌리길 바랐다. 그런 내가 우울증에 걸리든 말든 다들 관심이 없었다. 밥은 차릴 수 있는지, 설거지는 해놨는지, 빨래는 걷어놨는지, 방청소는 해놨는지만 확인했다.
나는 진짜 가난한 사람이었다. 우울에도 빈부격차가 있었다. 돈이 없어서도 가난하지만 내가 힘들 때 주변 상황이 가난해서 가난하다는 것을, 우울이 진짜 가난이 뭔지를 알려줬다. 부처님 말씀 중에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는 인생이 너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과연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일까? 위의 세 가지가 없어도 슬퍼하지 말라는 뜻일까? 가난해보니 결국 나만 남는다. 나까지 가난해지면 생각나는 게 자살 밖에 없는 거다. 내가 낸 해결책이 결국 내 존재의 무가치함을 증명해 내는 거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그러니 주변환경에 기대할 것이 없다면 나를 바라보자. 남에게 바라지 않아도 언제나 힘을 줄 수 있는 나라는 존재 말이다. 위의 세 가지를 모두 내가 내 자신에게 스스로 할 수 있다면 그것 만큼 좋은 게 어딨 을까? 또한 위의 세 가지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할 수 있다. 나는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니며 주변을 가난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힘들면 힘들수록 남에게 기대려는 마음보다 나에게 더 기대어보겠다. 내가 가난하지 않으면 내 주변 사람도 가난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우울증으로 내가 무엇이 필요하고 비어있는지 알게 되어 잘 채우고 더 나아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