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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표류기

자작시

by 이차원

눈을 떠보니 역이었습니다.

종점이라고 기관사분이 재촉하길래 헐레벌떡 내렸지요.

뒤돌아볼 시간은 없었는데,

다행히 짐을 안고 있던 덕에 놓고 온 짐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대체 내가 왜 여기 온지 모르겠는 겁니다.

내가 왜 이러지 싶어서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재빨리 핸드폰을 켜서 카톡, 인스타, 심지어 안쓰던 메모 어플까지

샅샅히 뒤졌지만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청년 치매인가 싶어 덜컥 겁이 나긴 했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서 일단 위로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금방 올라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이 걸리더군요.


한참을 걷고,

고장난 무빙워크 위를 걷고,

줄이 길게 늘어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다시 또 걷고,

몇 번 이 과정을 반복해서야 겨우 플랫폼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고생도 잊혀질 만큼, 역은 무척이나 크고 화려했습니다.

사람도 정말 많고, 입구도 여러개.

위층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쇼핑몰도 갈 수 있더군요.

뭐, 다 제 관심사는 아니여서 한쪽 구석으로 가서 앉았지요.

그곳에는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무료하게 TV나 핸드폰을 보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할 일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는데, 저는 그들이 부러웠어요.

어디로 갈지를 뚜렷이 알고 있는 게 참 좋아 보였습니다.

저는 거기서 1시간 가량을 앉아 있었는데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거든요.

아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아까 지나친 몰이라도 들어가보기로 했지요.

그렇게 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꽤 크더군요.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옷들이 즐비한 복도를 걷고,

괜히 화장실도 한 번 가주고,

다시 또 에스켈레이터를 타고,

매 층 마다 구경을 하다가 맨 꼭대기 층에 왔습니다.


옥상에는 하늘 정원이 있었습니다.

저는 역시 한쪽 구석에 있는 테이블을 잡아 앉았습니다.

커피도 한 잔 카페에서 야무지게 뽑아왔지요.

다른 테이블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아주머니들,

그리고 고딩 무리로 보이는 애들이 있었습니다.

많지는 않았어서 얘기하는 소리들이 대충 다 들렸지요.

그들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상사 얘기, 애들 얘기, 친구 얘기들을

하고 또 하고 또 하며 깔깔대고 웃고 그러고 있었습니다.

저는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스마트폰을 켜서 유튜브 영상을 열었습니다.

평소에는 재밌던 것들이 그 날따라 왠지 흥미가 없더군요.

그냥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내려갈 때는 엘레베이터를 타기로 했지요. 금방 내려갈 줄 알았는데,


한층에서 서고,

문이 열리고,

사람 들어오고,

다시 또 문이 닫히고,

매 층 마다 이짓을 반복하면서 내려왔습니다.


다시 내려온 플랫폼에서 저는 이제 진짜 갈 곳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어딜 가기로 했는지 기억이 안나면 갈 곳을 찾아서 가면 되니까요.

스마트폰을 켜서 지하철 노선도를 켰지요.

인스타도 뒤져 봤고요.

인터넷 검색도 열심히 해봤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모르겠는 겁니다.

그제서야 저는 한 가지가 기억났습니다.

어딜 가야 될지 모르겠어서 전철을 탔었다는 걸요.

저는 그 뒤에 한참을, 정말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지도 않고,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아무도 보이지 않을 쯔음.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제는 역무원분이 오겠다 싶어서 막차라도 타야 되겠다 싶었지요.

어, 그런데 갑자기 개찰구에서 카드가 안찍히는 겁니다.

한참을 해도 안되서 역무원을 부르고 하다가 어찌어찌 해결해서

부리나케 아까 왔던 길을 달려서 갔지요.

에스컬레이터고 무빙워크고 뭐고 다 뛰어넘어서 갔습니다.

생각보다 금방왔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우우웅하고 전철이 들어오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습니다.

조마조마하면서 계단을 따라서 내려갔지요.


한 발 내딛고,

다른 발 내딛고,

다시 한 발 내딛고,

다시 다른 발 내딛기를

두 계단씩 뛰어서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헐떡이면서 마지막 계단을 뛰어 넘어 왔을 때,

눈 앞에서는 문이 닫히고 있었습니다.

저는 안간힘을 쓰며 들어가보려고 가방이라도 내밀었지만,

제 팔이 무색하게도 문은 닫히고 말았지요.

그냥 그게 끝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지하철은 떠나버렸지요.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내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정거장에,

아니 이 역 전체에

있는 사람은 저뿐인 것 같았습니다.

뭐, 별 수 없으니 택시라도 타러 나가야 되는데

왠지 발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도무지 왔던 길을 다시 갈 자신이 없었어요.

잠깐 숨이라도 골랐다 가려고 의자에 앉았는데,

눈물이 나더군요.


그 날, 그 의자에서.

역무원이 오시기 직전까지,

펑펑 울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러냐고,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시는 말에 대답도 못하고,

그냥 애처럼,

계속 울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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