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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러나 Nov 04. 2023

2-2 한 발만 더 디디면

평생 밟은 적 없는 땅이 펼쳐져요.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봤다. 3개의 시리즈만 해도 러닝 타임이 10시간이다. 거기에 호빗 시리즈까지 다 봤다. 잉여인간만이 지닌 특권이었다. 6개의 시리즈 중 명장면을 꼽으라면,  샘과 프로도가 이제 막 모험을 떠나려하는 장면이라고 말하고싶다. 평생 호빗족을 떠나본 적 없는 프로도에게 샘이 말한다.


"여기까지에요"

-여기까지라니?

"여기서 한 발만 더 디디면 평생 밟은 적 없는 땅이 펼쳐져요"


그 한 발부터 절대반지를 지키는 여정이 시작된다. 상상하지 못한 모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만약 거기서 프로도가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호빗을 떠나지 않기로 했다면 어땠을까.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한 발만 더 디디면 평생 본 적 없던 것이 펼쳐지던 그런 순간.


집 앞엔 한강으로 이어지는 탄천이 있었다. 내 유일한 숨구멍은 탄천에서 자전거 타기였다. 그런데 숨을 쉬면서도 스스로 정한 코스, 그러니까 청담대교 직전까지만 달리다가 되돌아갔다. 스스로에게 '넌 여기까지야' 라고 선을 그어놓은 듯 했다. 반드시 거기까지만 가야하는 이유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계산했을 때 거기까지가 시간이 적당했을 뿐. 그리고 탄천도 충분히 아름다웠기 때문에 굳이 한강까지 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더 욕심낼 이유가 없었던 거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10초 더 페달을 밟았다. 겨우 10초였을 뿐인데 머리가 아찔해지는 광경이 펼쳐졌다. 가슴이 시원해지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탁트인 한강이었다. 남산, 롯데타워, 서울의 모든 랜드마크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코 손에 잡히지 않을만큼 멀리선 건물들은 지평선 같아 보이기도 했다. 좁은 탄천만 보다가 한강을 보니 이건 흡사 끝없이 펼쳐진 바다였다.


10초만 더 갔으면 이 모든 것을 매일 누릴 수 있었을 텐데 왜 나는 그냥 돌아갔을까. 왜 지금까지 조금 더 페달을 밟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왜 다시 되돌아왔을까. 그날 아찔해졌던건 풍경 때문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제한해왔던 어리석은 나를 책망하는 마음 때문이었고, 앞으로 내 인생에서 용기와 도전의식을 가져봐도 되겠다는 생각을 가져서였다. 그날부터 나는 스스로를 제한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됐다.


 그러나 관성이 있어서인지 나는 살아가던 삶을 꽤 잘 지켜냈다. 때때로 그날의 감각이 나를 충동질했지만 통장잔고, 카드값이 엉덩이를 무겁게했기 때문이다. 결국 1년이나 버텨낸 뒤 두손 두발을 들었다. 충동질의 총량이 임계점에 다다른 후에야, 그날의 감각이 기어코 나를 회사 밖으로 내보냈다. 퇴사할 때는 잔뜩 번아웃된 마음으로 너덜너덜했지만, 내 마음 한 켠에는 새로운 것에 나를 내던지는 것은 더는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는 알맹이가 굴러다녔다. 웅덩이가 아니라 바다가 되고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윽고 나는 한번 더 10초의 페달을 더 밟았다. 이번엔 한강보다 더 넓은 곳으로 향했다. 가본적 없는 곳에서 경험해보지 않은 삶을 살아보는 것이었다. 제주 사계리에 위치한 공유오피스인 '오피스제주'에서 노마드스탭을 모집하는데 신청했더니 선정돼버렸다. 한달동안의 숙박과 오피스 사용을 댓가로 약간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퇴사 후 두달 뒤 몸과 마음이 약간은 회복되었으니 전사 정도의 기세는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두려움이 스멀스멀 일었다. 아무 연고도 없고 지금껏 가보지도 않은 곳에서 한달을 살아보려니 걱정이 된 것이다.  안락지대 밖으로 나를 밀어내는 일은 쉬운 듯 쉽지가 않았다.  못가겠다고 할 수는 없는지, 선택을 번복할만한 핑곗거리들을 조금씩 떠올리는 며칠을 보냈다. 10초의 페달이라고 하기엔.. 등허리에 걱정을 짐처럼 지고 거센 오르막을 오르는 것 같았다. 무거운 페달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사람과 한달동안 잘 지낼 수 있을까?'

'지금껏 해본 적 없는 일을 문제없이 잘 해낼 수 있을까?'

'차를 가져가려면 배를 타야하는데, 목포까지 장거리운전을 해낼 수 있을까?'


‘…..내가?’






제주에 다시 내려가기 3일전까지도 내려가지 않을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지 못해 초조해했다. 결국 올해 육지에서의 여름은 이 며칠로 끝이겠구나.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나홀로 서울투어를 나갔다. 서울의 여름을 다시 즐길 수 없겠다는 아쉬운 감정, 두렵고 긴장되는 마음, 설렘 등 여러가지가 비벼진 마음이었을테다. 그래서 푹푹 찌는 더위에도 도시와 영영 작별할 사람처럼 서울을 누볐다. 그리고 마치 다이어트 시작을 하루 남긴 사람처럼 먹고 싶은 음식을 원없이 사먹었다.


연남동과 망원동의 디저트를 모두 접수한 후, 한남동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분명 푸딩을 먹을 때만 해도 도시의 복잡함과 더위를 견딜 초인적인 힘이 생긴 줄 알았는데, 경기도로 가는 버스를 한 30분 기다리니 난 그저 무말랭이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덥고 습한 날씨에 아픈 다리까지. 빈좌석이 0인 버스가 여러번 왔다갔다 하며 희망고문을 해댔다. 화도 났고 서울이 지긋지긋해졌다. 이번 여름엔 두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 육지를 떠나겠다는 마음이 거기서 먹어진 것이다. 무더위의 정신없는 도시를 떠나 제주로 도망쳤다. 제주의 여름이 얼마나 더 뜨거울지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프로도는 같이 떠날 친구들, 반지원정대라도 있었지만, 나는 혼자였다. 난이도로 따지자면 내가 더 높은게 아닐까. 제주로 가기위해 목포로 배타러 가던 날, 장대비가 눈 앞의 모든 걸 가려버렸다. 제주에 도착하기도 전에 제 명에 못살고 죽는게 아닌가. 비를 피할겸 군산에서 2시간이나 쉬었다. 겨우 비가 그치자 목포에 도착했다.  8시간의 대장정 끝에 올라탄 퀸제누비아호는 안식을 주지 못했다. 흔들리는 배속에서 거의 잠을 자지 못했을 뿐더러 혼숙이었다. 5시간 내내 고된 시험의 연속이다.   


 절대반지를 품고 가는 프로도의 여정도 쉽지는 않았겠지. 잠도 못자고 죽을 고비도 넘기고.. 그래야 영화 한편 정도는 되는게 아닐까.  좀비가 된 채로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우진해장국을 위장에 욱여넣었다. 정신이라도 온전치 못할거라면 위장이라도 온전하자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영화관에서 조조영화 아무거나 끊고 한숨잤다가 일어나서 잠깐 친구를 만나 커피 한잔을 들이켰다. 친구에게 두려움을 한사코 털어놓고 용기와 마음을 충전한 뒤 사계로 내려갔다. 공항에서 1시간이나 떨어져있는 곳이었다. 그날만큼은 하루가 24시간이 아닌게 분명했다.


저녁 6시, 겨우 도착한 오피스제주.


'안녕하세요. 구루마 좀 쓸 수 있을까요?'


한달 있을거면서 거의 세달치의 짐을 싸서 내려온 탓에 구루마로 몇번을 옮겼다.


오피스제주의 철문을 열던 그 순간, 지금 떠올려보면 그 순간은 아마 샘이 프로도에게  '여기서 한발만 더 디디면 평생 밟은 적 없는 땅이 펼쳐져요'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 이후부터는 이전에 내가 알던 생존공식이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바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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