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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러나 Oct 22. 2023

4-1 쉽게 이직할 거면 이렇게 퇴사하지도 않았지

아직 일하기 싫습니다

퇴사 후 제주에 내려오니 '너 좋아 보인다' '너 행복해 보인다'는 연락이 오면 많은 생각이 들었다. 행복하긴 하다. 그런데 마냥 좋지만은 않다.


이제 뭐 하면서 살 거냐

다시 일할 준비는 하고 있냐

이제 슬슬 뭔가를 해야 하진 않겠냐

이런 말들에 마음에 아직은 불(火)이 나는 9월이다.  


다들 퇴사하고 제주에 가는 걸 부러워했지만 6월엔 멍 때리는 것과 시계 없이 밥을 먹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었다. 사람과는 일주일에 한 번만 대화했다. 관광객이 많은 제주에선 사람이 오지 않는 시간과 장소만 공략해서 다녔다. 작은 소음에도 아주 예민해져서 한 식당에서는 귀와 눈을 막고 고개를 푹 숙여버린 날도 있었다.


7월 초엔 여전히 사무실 사진만 봐도 답답하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무언가를 해내려고 하면 가슴이 조여왔다. 나는 애써 집을 청소하면서 비워내고 또 나를 살려보자고 부단히 노력했다.


8월은 자비로웠다. 오피스제주 사계점(공유오피스)에 지내면서 일하는 공간, 타인과의 관계, 나의 과거(HR)를 겨우 받아들였다.


그리고 9월,  원래는 올해까지는 아무것도 안 하고 펑펑 놀자고 다짐했는데 이제 퇴사하고 3개월쯤 되니까 예상보다 통장잔고는 빠르게 비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안부에 괜히 조급해지고 불안해지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니 몸값이 곧 떨어질 테니 얼른 이직 준비하라는 말에 속으로 대차게 한마디 했다.


'그렇게 쉽게 이직을 다짐할 거였으면 이렇게 퇴사도 안 했지..'


그리고 '아직 나 안 괜찮고 일하기 싫으니까 직장 얘기하지 마'라고 떼쓰고 싶었다. 아니 간곡히 부탁하고 싶었다. 제발 일하라는 말을 하지 말아 달라고. (그래서 육지에 올라가기 싫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9월에는 목표가 생겼다.

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회피하는 거라면 그것대로 들여다볼 것

당장 무언가를 하겠다는 건 아니어도

다음 스탭을 위해서 조금씩 마음을 열어볼 것


마음들이 조금 더 회복되는 9월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왜 그렇게 일이 쳐다보기 싫어졌는지도

번아웃이 왜 왔던 건지도 이유를 알게 되길.


제발 일하지 말고, 좀 더 쉬라고,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라는 말을 듣고 싶은 건 철없는 서른의 욕심일까

조금만 더 둥둥 떠다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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