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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러나 Oct 18. 2023

1-2 연애 말고, 떡볶이 말고.

지금의 내게 더 필요했던 것.


제주까지 왔는데 연애 얘기가 빠지면 섭섭하다.


김녕을 좋아하는 건 김녕바다를 처음 본 내 스물여덟 때문일지도.


스물여덟의 제주에서는 이름만 듣고도 심장이 땅에 떨어지고 기절할 것 같은 사람을 봤다. 얼굴을 보고는 더 까무러칠 뻔했다. 3년을 만났던 연인과 이름도 똑같고 얼굴도 똑같고 옷스타일도 똑같은 사람과 마주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는 서른이 되기 전에 생을 마감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마침 그날도 밤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아 누군가가 한참을 찾아다니게 만들었다. 나는 그 사람이 떠오를 때마다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보며 빌었다. 오늘도 살길, 오늘도 살길.


시간이 흘러 몇 년 후인 최근, 그 사람은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단다. 이제 죽겠다는 소리는 안 하겠지. 다시 한번 그의 안녕과 행복을 빈다.


그렇게 스물여덟의 제주는 다이내믹했으니, 서른한 살의 제주도 다이내믹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잔잔하고 평온하다. 재밌는 일이 없어서 아쉬워 죽겠는 마음은 뭘까.


기껏 제주까지 왔으니 일탈을 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문란해지지가 않는다. 흥미진진한 삶을 살지는 못해도 자극적인 것 하나는 품을 수 있지 않나. 그러다 기껏 생각해 낸 최선은 떡볶이 먹기였다. 그래서 김녕에서 평대까지 넘어갔다. 수요미식회에 나온 떡볶이와 한치튀김을 먹으러.


신라면도 먹지 못하는 맵찔이에게, 떡볶이는 도전이고 반란이다. 큰 용기였다. 그런데 아뿔싸, 크게 배탈이 났다. 나에겐 떡볶이도 사치인가. 왜 이렇게 이 몸뚱아리는 마음을 따라주지 못하는건지 반은 억울했고 반은 울컥했다.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렸다. 화장실이 없다. 탁 트인 바다뿐이었다. 이렇게 흑역사를 쓸 수는 없다. 하는 수 없이 가장 가까운 카페에 들어갔다. 급한 일을 처리하고 그냥 가기 그래서 카페에 들어앉았다.


그런데 이곳이 주는 분위기와 공기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창가에 앉아 바다와 나 사이에 따뜻한 청귤차를 하나를 뒀다. 마음을 안아주는 따뜻한 음악과 바람, 시원한 바다, 좋은 날씨. 때마침 손님도 없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모든 게 완벽한 순간이었다. 떡볶이와는 다른 매력이었다.


무엇보다 분당에서 지지고 볶던 전장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순한 맛, 유기농, 수채화, 동화 그런 단어들만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서른한 살의 나한텐 떡볶이가 필요한 게 아니라 이런 거였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다이내믹한 사건과 흥분되는 만남이 아니라,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일 그런 거. '정화'라고 해야 적당한 단어를 골랐다고 할까. 아, ‘해독’이 더 가까울 것 같다.


바다에 씻어냈어야 하는 어떤 분노,

진작 바람에 태워 보냈어야하는 미움,

언제 생겼는지도 몰랐다가 뒤늦게 발견된 상처들을 조금 찬찬히 흘려보내는게 필요했다.


결국 한 달 내내 제주에서 떡볶이는 못 먹었다. 아니 안먹었다. 떡볶이를 왜 못 먹었는지 왜 안 먹어도 되는지 알 것 같은 하루를 보냈기 때문. 일하던 기억이 전생처럼 바다에 휩쓸려갔으니 떡볶이는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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