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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러나 Oct 22. 2023

2-1 퇴사 후 백수의 긴 여행은

무엇을 위함인가


제주 한달살이가 끝났다.


한라산에서 길을 잃고 사슴을 만난 적

갈치조림을 먹으면서 엄마를 그리워한 적

수입도 없으면서 비싼 디저트로 사치한 적

우진해장국으로 마음의 헛헛함을 채워본 적

우연히 들어간 디저트카페 사장님과 친해진 적

생판 모르는 사람과 만나 제주시의 맛집을 탐험한 적


어디에도 없지만 늘 함께 있는 바람을 눈으로 본 적

감자수프로 위로받은 적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한 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도 했었다. 거친 안개를 가르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는데?' 하는 날도 있었다. 또 언젠가는 쿠키가 날 보고 웃는 것 같아서 무작정 버스 타고 바다로 떠난 날도 있었다. 그러다 버스가 끊겨서 외딴 길을 헤매다 네 명의 제주청년을 만나 덕분에 집에 무사히 갈 수 있었던 에피소드도 있었다. 그런 특별한 일이 없어도, 마트에서 참외 냄새만 맡다가 빈손으로 돌아와도 더이상 바랄게 없던 날도 있었다.


바쁘고 충만한 백수의 삶이었다.




사실 제주도엔 한달살이를 하러 간 게 아니었다. 애초에 돌아갈 비행기표를 끊지 않았다. 흘러가는 대로 살면 안 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안 돌아올 생각도 있었다. 게다가 버릴 것이 많았던 여름이라, 충분히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다 비우고 버릴 때까지 떠돌아다닐 생각도 있었다.  


가능하면 한달살이를 두 달 살이로, n달살이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려면 최대한 비용을 줄여야 했다. 그런데 당연히 되리라고 기대했던 '한 달 숙박무료 이벤트'에 탈락했다. 망연자실하다가 숙박을 제공하는 공유오피스 스탭도 지원했는데 다음 달 스탭은 이미 정해졌으니 8월에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런데다 때마침, 5월 말에 지원했던 정부 프로젝트에서 1차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붙든 떨어지든 하는 수없이 면접은 봐봐야 하니까 다시 육지로 돌아갔다.


이런저런 이유로, 7월에는 아무래도 제주에 있을 운명이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도 날 밀어내다니. 보이지 않는 어떤 강력한 힘이 나를 자꾸 육지로 올려 보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분당집에 들어가지도 않는 영혼을 억지로 욱여넣었다.  드넓은 제주의 하늘과 바다를 알아버린 탓에 도시가 자꾸 목을 옥죄는 것 같았다.


아무리 떼를 써도 현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분당에 다시 정을 붙이기로 했다. 한 달만, 딱 7월 한 달 만이다.  이렇게까지 7월을 분당에서 살아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운명이 있다면 난 이 운명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그럼 이제 한 달 동안 백수는 뭘 해야 할까.  






퇴사하던 날, 한 임원이 말했다.


'퇴사하고 어디 잠깐 여행 간다고 인생이 변하지는 않는다더라. 똑같을 뿐이야.

여행 갔다 돌아오면 대체로 다시 회사원의 삶을 살 뿐이야. '


나도 안다. 퇴사 후 여행은 잠깐이고 환상일 뿐이다. 그것 때문에 인생이 바뀔 확률은 적다. 퇴사 후 백수의 여행이란, 수능 끝난 대학생이 해방감에 젖어 노는 것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내 여행은 조금 다르다. 내게 여행은 '돌아오기 위함'이다. 퇴사 후 백수의 긴 여행은 자신에게로 돌아오기 위한 긴 - 긴 여행이 아닐까.


"여행이란 떠남과 만남의 낭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재발견이었습니다.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정직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우리의 아픈 상처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숲> 신영복


나는 한 달의 제주살이를 끝내고 정직한 모습이자 아픈 상처로 돌아왔다. 시간과 돈과 마음을 방류하다가 미처 흐르지 못한 내 모습들을 마주했다. 퇴사를 선택한 건 나를 돌보기 위한 것이므로 정직한 내 모습을 회피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퇴사 이후 한 달의 쉼은 이완이 이루어지는 시간이었지만 풀어진 삶을 살기만 하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은 아니므로 언젠가 다시 달릴 날을 위해 신발끈을 고쳐 매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마도 7월은 그런 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7월에 나만의 작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한 달 동안 집, 차, 내 몸, 마음, 먹는 음식,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돌보는 것. 나 스스로를 잘 키워내 보겠다는 마음이었다. 그건 육아였다. '나'를 기르기 위해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구나. 이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없었다. 제주에서 더 오래 지내지 못한 것이 억울하지 않았다. 충분히 납득이 되는 7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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