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흰 눈이 내리는 날 남편을 처음 만났다. 마치 준비한 것처럼 외딴곳의 작은 식당에는 우리 둘 뿐이었다. 대화를 하면서 나의 지나온 시간들이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다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남편은 ‘세상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호기심이 충만한 자유로운 영혼인 그와 달리 나는 전형적인 틀에 박힌 단조로운 사람이다. 매일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어도 괜찮았다.
나에게 세상은 즐기는 곳이 아니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정신을 차리려고 늘 애를 썼다. 그런 내 눈에 남편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봄에는 벚꽃을 봐야 했고 가을에는 내장산의 단풍을 보러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나밖에 모르는 단순 그 자체인 나와 다르게 그는 다양한 영화, 음악, 책을 좋아했다. 특히 음악은, 내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레이디 가가부터 시작해 가곡을 넘나들다 중국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아울렀다.
우리의 결혼으로 득을 보는 것은 남편이라고 생각했다. 엄격한 잣대로 평가받는 종교인으로 살아남으려면, 정답대로 사는 나 같은 사람이 남편을 잡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름이 되면 알록달록한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어디든 활보하고 싶어 하는 그를 막고, 나이에 맞는 얌전한 디자인과 색상의 옷을 입히려 했다. 기준이 없어 보이는 그의 삶에 기준을 세워 주고 싶었다. 안 되는 것을 늘려갔다. 그럴수록 남편과 나는 부딪혔다. 남편의 눈에 나는 지독한 율법주의자였다.
이 남자와 4년을 살아보니 이제는 알겠다. 우리의 결혼으로 득을 보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라는 것을. 남편은 나의 세계를 확장해 준다. 나에게 음식은 그저 배를 채우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런 내가 남편 덕분에 맛집을 간다. 나 혼자라면 마트에서 절대 고르지 않을 법한 음식도 남편 덕에 먹어본다. 처음에는 새로운 경험에 돈을 쓰는 게 그저 아까웠는데 이제는 내가 먼저 움직인다. 남편과의 대화는 의견 충돌의 시간이 아니라 나의 편협한 시각을 넓혀주는 소중한 시간이다.
매사에 진지하고 걱정이 많은 나에게 남편은 즐기라고 말한다. 덕분에 긴장이 가득해 굳어져버릴 법한 순간에도 약간의 틈이 생긴다. 아직 그를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지만, 나의 작은 변화들이 꽤 반갑다. 한때는 너무 성급하게 결혼을 한 건 아닌가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남편에 대한 이해가 커져간다. 그에 대한 이해가 커질수록 그가 나와 달라서 참 다행스럽다.
이제 곧 결혼기념일이다. 이번 결혼기념일에는 남편이 좋아하는 햄이 잔뜩 들어간 부대찌개를 끓이고 꽃 한 송이를 선물하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 덕분에 나의 인생이 아름다워졌다고. 당신이 나와 달라서 정말 좋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