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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럽키진 Feb 24. 2022

큰 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동생에게 남기고 간 선물

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알았더라면

 

2014년은 아주 특별한 해이다.

칠공주에서 육공주가 되었고, ‘나’라는 사람에 대해 처음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삼십칠 년 간 살아오면서 나에 대한 이야기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해본 적이 없다.

그래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불편감이 없었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가수의 노래를 즐겨 듣고, 고향이 어디인지에 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한다.

그러나 그 이상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가족과 집안 사정, 자라온 환경이나 어릴 적에 관한 것은 입에 담아본 적이 없다.

깊게 궁금해 한 사람도 많지 않았지만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처럼 과거는 잊고 지냈다.

부모님과 여섯 명의 언니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도 고아처럼 행동했다.

물론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전에는 도움을 받았지만 정서적 교류는 별로 없었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속담이 있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이는 더 이상 울지 않을 것이다. 울어도 젖을 주지 않는 것을 체득한 아이는 다른 방법을 쓰거나 굶을 것이다.

관심과 사랑을 달라고 하다가 못 받는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한 아이는 혼자가 된다.

힘든 일이 있어도 큰일이 일어나도 아이는 가족에게 털어놓지 않는다. 들어줄 가족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렸지만, 각자가 다 힘들게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보태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땐 그랬다.


친한 친구들에게 외롭다고, 우리 집은 이렇다고 이야기할 만도 한데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귀 기울여 내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줘 본 적이 없어서 어색했을 수도 있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어떻게 생각할까 불안함도 컸을 것이다.

엄마가 이모에게 빌려 준 돈 때문에 다투실 때마다 아빠가 괴롭히시고,

가난해서 언니들은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공장에 돈 벌러 나갔고,

아빠는 딸만 일곱이라 자식 없는 사람이라고 평생 한으로 우울하시고,

엄마와 언니들은 막내인 나한테는 관심이 없고, 잘 따르고 요구 많은 다섯째 언니한테만 죄다 신경 쓰고 있다는 말을

막힘없이 쏟아내어 위로받고 싶은데, 나와 가족을 우습게 보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마도 그것보다는 생각하면 복잡해지고 우울해지니 피하는 게 상책이다 싶었을 것이다.

밝고 활발했으니까. 그런 척하고 싶었으니까. 우울해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고생만 했던 큰언니가 세상을 떠난 그 해 여름, 괴로웠다.

‘언니와 잘 지낸 적이 거의 없는데, 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지도 못했는데.. 어쩌지..’

언니가 마지막 떠나는 길, 의식이 조금 남아 있을 때 처음으로 한 말

“사랑해 언니”

복수가 차고 황달로 노랗다 못해 검은빛이 나는 얼굴에 입술은 마르고 혀는 굳어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나도” 한다.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까지 언니에게 해 준 게 없는데, 철없는 막내가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 어쩌지.

“고마워 언니”

언니에게 모질게 굴었던 지난날들이 후회되고 미안하고, 못난 내가 많이 미웠다.

언니 마음을 몰라주는 이기적인 모습이 부끄러웠다.


언니를 떠올리면 몇 가지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큰 소포가 와 있었다.

공장에서 언니가 힘들게 번 돈으로 동생들 옷이며 신발을 종종 보냈는데, 이번엔 옷이다.

언니들에게 물려받은 옷만 입다 보니 딱 맞는 옷을 입는 게 소원이었는데,

엄마가 사셨던 촌스러운 색과 디자인이 아니라 세련된 서울 옷 같아 더 마음에 들었다.

어느 날은 여름휴가로 집에 올 때 머리끈을 선물로 사 왔다.

엄마가 아침마다 일을 나가시며 긴 머리를 묶어주시는데, 바삐 묶는 거친 손에 머리가 당겨져 아프다고 계속 울어서

그날 단발로 잘라버린 날이었다. 하필 머리끈을 사 와서 하지도 못하고 정말 이뻐서 더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큰언니가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결혼식을 올리기 전 시골집에 한두 달 와서 지냈었는데,

열여섯 살 차이 나는 막내를 많이 귀여워해 주었다.  

일곱 살을 큰 자전거 짐받이에 태우고 한 시간 넘게 페달을 밟아 시내 구경시켜준 일과

결혼 준비를 한다고 버스를 타고 백화점에 데려가 무리해서 선물해준 그 인형을 잊을 수 없다.

나중에 엄마가 정신없다면서 몇 개 없는 장난감을 불에 태워 없애버린 빨간 드레스를 입은 눕히면 눈을 감는 인형.

말도 없이 불에 태워 버려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언니와의 추억을 떠올려 보니 사랑을 못 받은 게 아니었다.

가족이 날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했었던 것을 몰랐을 뿐이다.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가족이 없는 것과 다름없다고 단단한 벽을 쌓으면서 그 안에서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삼십칠 년 동안 모르고 살았다.

조금은 늦었지만 진심으로 가족과 소통하며 살고 싶었다.


먼저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기로 했다.

오랜 기간 가까운 사람에게 간단한 속마음 하나도 꺼내 보여주지 못한 이유도 알고 싶었다.

집과 관련된 아무 이야기나 꺼내고 깊은 고민을 털어놓아도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경험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두려웠다.

그래서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소통 수업에 참여했다.

‘아무렇지 않구나’ ‘사는 게 비슷하구나’

모두가 각자 고민과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속마음을 드러내 보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나’를 깊이 들여다보면서 가족 구성원 모두 애쓰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가족과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큰언니의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막내에게 소통의 힘을 주고 떠난 것이다.


보고 싶다.

한동안 잊고 지냈다.

중환자실에 배가 불룩해 산소마스크를 쓰고 누워있던 언니 모습을 떠올리기 두려웠다.

숨어있던 슬픔 밀려올까 봐 차마 머릿속에 넣어둘 수가 없었다.


언니 미안해.

거기에서 잘 지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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