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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럽키진 Oct 17. 2022

내 소망을 이뤄준 갱년기에게

학교에서 진로강의를 시작했다


 이런 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서른에 결혼을 하고, 신혼에 덜컥 임신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독립심이 강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불통의 아이콘인 어린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물론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어릴 적부터 아기들을 좋아하긴 했었다. 그러나 그저 바라보면 귀여운 아기와 하루 종일 붙어있는 내 자식과는 다른 의미이니까.


 결혼하기 전, 다짐 한 가지는 있었다. 일곱 딸 중 막내로 태어나 많은 사랑보다는 외로운 시간이 많았고, 가난이 더해져 철없이 요구하는 일은 하고 싶지도 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빨리 철들고 눈치를 보게 되는 아들 대신 태어난 딸. 사내남이 이름 안에 떡하니 있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가난도 아들이 없는 집이라는 것도 본가가 불행했던 이유이겠지만.. 아버지의 우울함도 한몫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고아로 자라면서 어린 나이부터 고생하면서 세상에 대한 불신과 혹독함을 경험했을 것이다. 행복 인자와는 평생 거리가 먼 채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더욱 자식에게 사랑과 관심을 많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희생으로 인한 참된 깨달음이라고나 할까. 덕분에 자상한 남편을 만나 아이들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것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결핍'의 경험에 굉장히 감사하고 있다. 언제나 한결같이 결혼 이상형은 아빠와는 다른 성격 좋은 남자. 가난이 지긋지긋하여 경제적 독립을 함께 할 수 있는 능력 있고 성실한 사람이 아니라면 결혼의 의미를 두지 않았기에.


 자식을 잘 키운다는 것은 뭘까..? 


 부모에게 내가 태어난 존재 가치에 대해서는 최소한 부정하는 것은 피해야 하고, 학교를 다니면서 필요한 교재를 사야만 할 때 미안함 없이 당당하게 비용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하고, 어떠한 형식으로든 부모의 다툼으로 불안함에 몸을 떨지 않아도 되는 그런 부모. 최소한 그 정도는 되어야 잘 키웠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 사랑을 받은 장면들이 어렴풋 하지만 몇 개 정도는 스쳐 지나가 어른이 되었을 때 '난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라고 스스로 일어나 걸아나갈 수 있는 그런 자식으로 키우고 싶었다. 그 에너지가 첫 육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부모에게 사랑과 존재 자체의 인정을 받은 자식들은 그 힘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느낀 대로 배운 대로 바로 적용하여 충만한 사랑을 큰 노력 없이도 줄 수 있겠지만, 그 사람들과 출발선이 다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육아의 시작이어야만 했다. 아이들을 귀여워하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고, 인내와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부모를 원망해 본 적도 있었지만 내가 살기 위해 가족의 행복을 위해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의욕만 앞서지 말고, 공부를 하자!!


 임신하고 태교를 위해 제일 처음 찾은 곳이 서점이었다. 태교에 관한 책과 음반을 샀다. 밤낮으로 클래식이며 동요, 잔잔하면서 아름다운 곡을 듣고, 평소 좋아하는 힙합과 댄스곡을 즐겼다. 태아에게 아빠의 목소리가 안정감을 준다 하여 퇴근한 남편에게 동화책을 읽게 했다. 실체를 모르는 불둑나온 배를 만지며 태명을 부르고 덕담을 수도 없이 했다. 배속에 있는 아이와 일상을 공유했고, 가끔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면서 누가 보면 정신 상태를 의심할 수 있을 만큼 대화를 심하게 주고받았다. "엄마가 오늘 이런 일이 있었거든. 그래서 기분이 그래. 태명이랑 얘기할 수 있어서 정말 좋다. 나중에 만나면 엄마가 많이 이뻐해 주고 같이 얘기도 하고 놀자"

날씨가 좋으면 산책을 가고, 비가 오면 우산 쓰고 중얼중얼 세상의 모든 모습을 설명하듯 끊임없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게 힘든 입덧과 만삭까지의 몸의 변화를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또한 영재로 키우고 싶은 큰 소망의 실천이었다. 이렇게 한다고 영재로 태어난다는 보장도 없고, 설사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큰 아이를 낳고서는 아동상담을 공부했다. 아이의 심리를 알아야 잘 키울 수 있겠다는 믿음도 있었지만, 늦게나마 진정 하고 싶은 일이 뭘까 생각해보니 심리상담사였다. 취업이 잘 된다는 엄마와 언니의 권유로 마지못해 간호사가 되었고, 적성에도 맞지 않는 일을 10년 가까이 해오다 큰 아이를 낳고 경력단절이 되었다. 억지로가 아닌 내 의지로 단절시켰다. 봉사와 희생정신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백의의 천사'도 좋지만, 이 일은 급여 이상의 의미가 별로 없었기에 오래 할 직업은 아니라 생각했다. 나름 신생아 중환아실에서 일을 하면서 깨달음과 경험의 소중함, 보람 비슷한 것들도 있었지만 남은 인생은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직업이 아닌 진심 열정을 쏟으면서도 지치지 않을 만큼, 지친다 해도 계속하고 싶을 만큼 날 가만 놔두지 않는 그런 일을.


 아이가 세 살 무렵, '꿈꾸는 다락방'을 읽고 용기를 냈다.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보기로. 아이가 있어 오프라인으로 대학에 갈 수 없으니 사이버 대학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낮에는 아이와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아이가 잠들면 그때부터는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새벽까지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고 과제를 했다. 그런데 그 시간들이 어찌나 짜릿하던지.. 어릴 적 학창 시절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내가 이리도 공부를 좋아했었나?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노는 것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모범생도 아닌 시절. 생각 많고 빈둥거리고 방황하는 학창 시절 모습이 떠오른다. 서른 중반에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닐 줄 꿈에나 생각했을까. 자존심만 세고 자존감은 바닥이던 나라는 사람도 달라질 수 있구나. 점 점 아주 조금씩 자존감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갱년기가 시작된 지금! 타이밍 기가 막히게 지금까지 공부해온 것들이 쌓여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막내가 초등학교 3학년인데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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