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D+178) 8월의 어느 날
- 터키, 도우베야짓(Dogubeyazit)
-도우베야짓은 넓은 평야 너머로 아라라트 산(5,137m)의 장엄함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터키 동남부의 작은 마을이다. 아라라트 산은 터키의 최고봉으로 노아의 방주가 정박한 성스러운 산으로도 알려져 있다. 도우베야짓에 도착한 나는 마을의 중심부를 가로질러 이삭 파샤 궁으로 향했다.
궁전으로 올라가는 길이 상당히 가파르기에 자전거를 근처의 공원에 세워 두고 걸어서 올라간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이 날씨의 변화를 감지한다. 정오 이후 점점 흐려지기 시작한 하늘에는 어느새 먹구름이 가득했다. 곧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근처에 있는 작은 찻집에서 잠시 비를 피하기로 한다.
쿠르드족인 찻집 주인은 미소가 해맑은 젊은이이다. 손님이 나밖에 없기에 우리는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눈다. 그는 에르도안이 집권을 한 후 쿠르드족의 삶이 더욱 힘들어졌다고 하소연을 한다. 특히 그러한 경향이 터키의 동남부 지역에서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사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 친구의 삶은 왠지 모르게 더 험난해 보이는구나. 이런 곳에서 한 잔에 2리라 하는 차를 팔아서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와중에 비가 그쳤다. 나는 찻값을 계산하기 위해 1리라짜리 동전 두 개를 꺼낸다. 1리라는 대략 백 원짜리 하나의 무게와 같다. 너무나도 가볍다. 하지만 나는 차 한 잔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음을 깨닫는다. 터키 사람은 언제나 차 한 잔과 함께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나는 찻집 주인과 작별 인사를 하고 이샥 파샤 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삭 파샤 궁은 오스만 제국의 중요한 건축물 중 하나이다. 1,900m 고지의 가파른 언덕 위에 세워진 이 궁은 1784년에 이삭이라고 하는 파샤에 의해 완공되었다. (파샤란 오스만 제국의 고위직을 말한다) 아나톨리아, 페르시아, 북 메소포타미아 등의 다양한 건축 기법이 사용된 이 궁전은 그 역사적, 건축학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현재 유네스코 문화유산 임시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이삭 파샤 궁에는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차려입은 한 쌍의 신혼부부가 웨딩 촬영을 하고 있다. 아니, 자세히 살펴보니 웨딩 촬영을 하는 신혼부부가 한 쌍이 아니고 무려 다섯 쌍이나 된다. 내 평생 한자리에서 이렇게 많은 신랑, 신부를 보는 건 처음이라 신기하기만 하다.
변덕스러운 날씨로 인해 비가 오락가락하지만 신혼부부는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인생 사진을 건지겠다는 불타는 결의가 엿보인다. 놀랄 것도 없지. 터키 사람들은 남녀노소 불구하고 사진 찍는 걸 무진장 좋아하니까. 터키에서 '메라바' 다음으로 많이 듣는 말이 '같이 사진 찍을까?'일 정도이니.
이샥 파샥 궁전 관람을 마치고 마을의 중심가로 나왔다. 이곳은 어쩐지 그동안 터키에서 지나왔던 곳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덕분에 분명 활기 있고 역동적이지만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왠지 모르게 많이 낙후되어 보인다.
거리에는 거지들이 유난히 많이 있다. 특히 꼬마 거지들이 참 많다. 그들은 내가 관광객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껑충껑충 내게 다가온다. 그러고서는 당당하게 적선을 요구한다. 걔 중에는 갓난아기를 등에 둘러메고 있는 여자아이도 있다. 10살 정도나 되었을까. 그녀의 눈동자는 이슬처럼 맑지만 표정은 돌처럼 딱딱하고 행색은 지독할 정도로 초라하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수줍게 나에게 내민 그녀의 손은 너무나도 작고 가련해서 잡으면 부서질 것만 같다.
내 호주머니에는 마침 동전이 몇 개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동전을 만지작거리지만 끝내 그것을 꺼내진 않는다. 조금 두려웠다. 한 명의 아이에게 적선을 하게 된다면 마을의 모든 아이가 메뚜기 떼처럼 몰려와 나를 먼지 한 톨 안 남기고 털어버릴 거 같았다. 또한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나는 결국 그녀를 외면하고 내 갈 길을 간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이런 말을 했다.
안전하고, 늘 평화롭고, 보기에도 그럴듯한 존재이지만 누군가가 호소할 때는 귀를 닫아두기로 결심하는… 이보다 더 비도덕적인 게 있을까?
이 일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렇다. 그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면 아이를 기쁘게 해줄 수 있었을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아이가 세상을 향해 웃어 주었을까? 그 아이의 눈빛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