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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호 May 24. 2022

천금보다 더 가치 있는 것

터키 8월의 어느 날 - 미드야트(Midyat)



- 미드야트 도심에 들어서자 후텁지근한 공기가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했다. 지금은 8월 말. 계절 상 한여름은 지났건만 터키 동남부의 더위는 도무지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뙤약볕 아래 자전거를 타는 정신 나간 사람(?)은 우리가 유일했다. 그 모습이 신기했는지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빤히 쳐다본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들이 더 신기하다. 사이드카가 달린 그 오토바이에는 운전자를 포함해 무려 7명이나 타고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미드야트는 의외로 조용하고 한적했다. 거리에는 사람도 차들도 생각보다 많지 않다. 텅 빈 버스 정류장에는 길게 늘어진 그늘만이 사람들의 빈자리를 메운다. 무슨 일인지 터키의 그 흔한 들개와 길고양이 한 마리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도 짐승도 더위를 피해 어딘가에 숨어 있는 걸까?’ 그동안 우리가 지나왔던 터키의 다른 마을들에 비하면 미드야트는 마치 무덤 속에 잠들어 있기라도 한 듯 고요하다.


그나저나 터키는 참으로 넓은 국가라는 걸 새삼 실감한다. 터키는 남한의 7배나 더 크지만 여기서 ‘넓다’라는 건 단순히 그 면적을 뜻하지 않는다. 몇 년 전, 자동차로 호주를 여행할 때 함께 여행하던 중국인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호주는 정말로 넓은 거 같아.”
“호주 정말 크지. 근데 중국이 호주보다 더 넓지 않아?”
“단순히 면적만 보면 그렇지만 중국은 어딜 가나 인산인해거든. 근데 호주는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외진 곳이 많으니까.”


그 친구는 호주 대륙의 황량함에 순수하게 감탄을 했다. 그것은 그녀가 중국에서는 결코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어쩌면 이런 반응이 16억의 인구 대국에서 온 중국인이 보일 수 있는 가장 극적인 반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터키가 가진 다양성에 순수하게 감탄을 한다. 한 나라에 여러 가지 기후가 있다는 것도, 다양한 인종이 산다는 것도, 여러 가지 언어가 사용된다는 것도 좀처럼 믿기지가 않는다. 오래전부터 한민족이 지배하는 조그마한 반도 국가에서 온 나로서는 이 모든 게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미드야트의 풍경은 마치 아랍 국가로 국경을 넘어오기라도 한 듯 그동안 터키에서 보아왔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도시는 약속이라도 한 듯 하얀 옷을 두르고 있다. 순백의 도시이다. 건물의 구조도 대문의 생김새도 높은 담장을 이루고 있는 돌의 모양도 뭔가 독특하다. 드문드문 보이는 교회의 첨탑이 미드야트는 터키에서 기독교인이 가장 많은 곳이라는 소문이 단순한 억측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있는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 터키에서 문화유적이 아닌, 실제로 예배를 보는 교회를 본 적이 있었던가.


이곳은 분명 터키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터키가 아니었다. 이곳은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가 탄생한 곳이었다. 횡재한 알라딘이 어여쁜 자스민 공주를 만나고 용기 있는 모험가 신밧드가 태어나고 자란 곳. 어렸을 적에 수없이 봤던 신비로운 이야기 속 마을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자전거를 밀며 주택가의 좁은 골목길을 지나가는데 우연히 어느 소녀와 마주쳤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녀는 우리를 발견하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얼음이 되어 우리를 신기한 듯 빤히 쳐다본다. 그녀의 한 손에는 사탕이 다른 한 손에는 쓰레기통이 들려 있다.


“안녕. 너 이 근처에 사니?”


가볍게 말을 건네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냅다 집으로 뛰어간다. ‘귀여운 여자 아이네. 근데 그렇게 후다닥 도망가야 했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그녀는 온 가족을 데리고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인을 만나기라도 하는 듯 우리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두 언니는 ‘니들 정체가 궁금해 죽겠다’라는 표정을 띠우면서도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반면 채 열 살이 채 되지 않는 동생들은 새로운 장난감이라도 생긴 듯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이들의 아버지의 손에는 터키의 민족 악기인 사즈(saz)가 들려있었다. 그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고서는 곧 현을 튕기기 시작한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과 리듬이 골목길 구석구석으로 뻗어 나간다. 저렇게 작은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리는 선명하고 경쾌하다. 현이 세 개밖에 없는데 이리도 음이 다양하다는 게 놀라웠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그의 연주를 지켜본다. 연주를 하는 그는 세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 자유롭고 유쾌해 보인다.


연주를 마친 후, 그는 우리를 집으로 초대해 주었다. 나무로 만든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좁은 마당과 몇 개의 문이 보였다. 마당 전체에는 무언가 코를 찌르는 강한 냄새가 가득했다. 가축 냄새였다. 아이들이 정면으로 보이는 문을 열자 그곳에는 좁은 공간에 양들 수십 마리가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서인지 양들은 모두 검게 보였다.


우리는 계단을 올라 이층으로 향했고 현관문을 지나 거실로 안내받았다. 거실은 족히 스무 명의 사람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지만 그 모양새는 참 휑하고 볼품없다. 벽 페인트는 군데군데 색이 많이 바랬고 그마저도 다 떨어져서 시커먼 회색빛을 띠는 벽의 맨살이 그대로 드러난 부분도 적지 않았다. 변변찮은 가구도 하나 없었다. 조그마한 아날로그 방식 TV와 그것을 받치는 테이블 그리고 거실 한쪽 가장자리를 채운 등받이 쿠션과 방석이 거실 살림살이의 전부일뿐이었다.


머지않아 안주인이 홍차가 담긴 쟁반을 들고 왔다. 나는 등을 기대고 앉아서 차를 홀짝홀짝 마시며 거실 구경을 하고 있는 사이 마틴과 베로는 주인아저씨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대화는 금방 달아올랐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첫 만남이 가장 어색하겠지만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첫 만남이 가장 설레고 즐거운 시간이다. 서로에 대해 궁금한 것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이름이나 고향, 어디로 가는지, 어디서 왔는지, 터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의 질문이 쏟아진다. 터키에서만 벌써 수십 번도 더 받아온 질문이라 우리는 어떻게 대답을 하면 상대방이 좋아할지 잘 알고 있다. 가족 모두 우리를 둥글게 둘러싸고 앉아서 우리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다. 그들의 두 눈은 반딧불처럼 초롱초롱하다. 막내 여자 아이는 베로가 너무나도 좋은지 애완견마냥 그녀의 품에 쏘옥 들어가 있다. 그러는 사이 아주머니는 커다란 쟁반에 음식을 준비해 오셨다. 우리가 아직 점심 식사를 못 먹었다고 말했었나? 아니다. 아무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이 점심시간이긴 하지만 이건 주인아저씨의 호의이자 먼 길을 가는 여행자들을 위한 사려 깊은 배려였다.


쟁반 위에 특별한 음식은 보이지 않았다. 양파와 고추 따위를 넣은 스크램블 에그, 토마토&오이 샐러드, 소금에 절인 올리브, 타히니(중동의 참깨 소스), 그리고 피데가 전부이다. 소박한 상차림이지만 그 배려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여기서 뭘 더 바라겠는가? 이들은 적어도 경제적인 면에서 보자면 나보다 훨씬 가난한 사람들이다. 주인아저씨는 대대손손 전통 악기를 만들어 판다고 했다. 악기를 만드는 솜씨는 차치하고서 생활수준으로 보면 결코 장사가 잘 되는 거 같진 않다. 그런데 먹여야 할 입은 부인을 포함해 무려 여섯이나 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결코 나아질 수 없는 살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를 임금님처럼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따뜻한 식사와 홍차를 대접하고 거실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앉게 해 주었다. 미소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고 가난할지언정 자신들의 온기가 넘치는 삶을 꾸밈없이 보여주었다. 나는 이런 친절과 호의야말로 부자들이 천금을 사회에 기부하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문 밖으로 나와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데 막내 여자 아이가 결국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주인 내외가 달래보고 언니가 달래보고 베로도 달래 보았지만 그녀의 울음은 좀처럼 그치질 않는다. 어린아이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모든 지 전심전력을 다 한다는 게 아닐까? 웃을 때도 울을 때도 만남의 순간도 헤어짐의 순간도 전심전력이다. 어쩌면 이게 내가 아이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나 또한 아이들 앞에서는 전심전력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문득 얼마 안 있으면 중학생이 되는 내 조카 녀석이 생각이 났다. 그는 어렸을 적 나와 헤어질 때마다 아주 대성통곡을 하며 나를 붙잡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조카를 달래야 했고 때로는 몰래 도망치듯이 집을 나와야 했다. 울며불며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조카를 놔두고 돌아서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내심 기뻤다. 나와의 이별을 저리도 뜨겁게 받아들이다니. 그만큼 삼촌이 좋은 거겠지?


나이가  지금은 사춘기에 접어들어서인지 아주 까탈스럽고 심드렁하다. 연락을 해도 답장이 없는 경우도 적잖다.  밉상아! 대성통곡할 때는 언제고 이제 아쉬울  없다 이거지.  괜찮다. 조카 녀석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그는 이미 내게 잊을  없는 행복한 추억을 선물해 주었으니까. 그리고  가족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친절과 호의는 결코 잊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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