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9월의 어느 날 - 아타튀르크 댐 인공호수
- 한여름의 터키 남동부는 무척 더웠다. 기온은 섭씨 40도를 가볍게 상회했다. 땡볕을 피할 나무 한 그루 쉬이 찾아볼 수 없는 이 지방은 정말 찜통이 따로 없었다. 도로를 달리다 보면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지독한 열기와 덤프트럭이 내뱉는 매캐한 매연이 소용돌이처럼 주위를 맴돌며 나를 괴롭혔다. 입안은 가뭄으로 갈라진 땅처럼 바짝 메말랐다. 매일 대량의 탄산음료로 마르지 않는 갈증을 해소하며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지만 이건 고육지책에 불과했다. 잇몸만 썩어 들어갔고 차가운 음료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지 복통에 시달렸다.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자전거를 탄 지 어느새 닷새째. 우리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이대로 여행을 지속한다면 정신병을 얻거나 또는 피부암을 얻거나 여하튼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거 같았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이건 정말 미친 짓이야. 이런 날씨에 계속 자전거를 타다가는 바짝 말라버리겠어."
“어차피 시간도 많은데 더위가 사그라질 때까지 한 일주일 정도 피서를 가는 건 어떨까?”
그렇게 피서지로 결정된 곳이 샨르우르파 지방에 위치한 아타튀르크 댐 인공호수. 아타튀르크 댐은 남동부 아나톨리아 개발 계획에 따라 만든 댐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클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인공호수는 댐 건설의 부산물로서 그 면적이 충주호에 12배에 달한다.
인공호수 근처에 자리 잡은 보조바 휴양 공원을 찾아가는 길. 물가 근처에 길게 늘어진 볼품없는 천막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들은 집시인가 아니면 난민인가? 긴 빨랫줄에 널린 빨래와 주변에 흩어져 있는 잡동사니가 저 사람들이 저곳에서 하루 이틀 지낸 게 아니라는 걸 말하고 있는 듯했다.
하루 전에는 엄청난 규모의 난민 캠프를 봤더랬다. 비록 이중 삼중으로 쳐놓은 철조망으로 인해 안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지만 그 모습이 뇌리에 강렬하게 박혔다.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텐트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지붕에는 AFAD(재난위기관리청)이라고 크게 적혀 있고 캠프촌의 중앙본부에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보금자리를 잃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난민촌에서의 생활이, 난민의 심경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대체 저들은 무엇을 잘못했기에 저런 고통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터키 전역에는 약 400만 명의 난민이 거주한다고 한다.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잠시, 피서지로 이곳에 온 건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호수의 물은 맑고 시원했으며 소나무 숲은 쾌적한 그늘을 드리웠다. 공원 관리자들은 친절하게 우리를 받아주었고 가로등 하나 없는 공원의 저녁은 매우 조용하고 어두워서 달빛만이 우리 곁에 머물렀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호수에 뛰어들어 유영을 즐겼다. 터키 사람들도 애어른 할 것 없이 물을 참 좋아했다. 털북숭이 남자들과 아이들은 옷을 홀라당 벗고 곧잘 물속으로 뛰어들곤 했는데 여인들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온몸을 가리는 히잡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은 물가 근처에 앉아만 있었다. 저 복장으로 물에 들어가는 건 아무래도 어렵겠지. 그렇다고 옷을 벗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고.
그랬는데 들어가는 여인들이 있었다. 어떻게? 히잡 드레스를 그대로 입은 채 들어간다.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옷을 다 벗고 들어간다고 해도 이만큼 놀라진 않겠다. 생각해보라. 나체로 물에 들어가는 남자와 정장을 입고 물에 들어가는 남자. 누가 더 미친 사람처럼 보이겠는가.
그럼에도 물에 들어간다는 건 어지간히 들어가고 싶어 했다는 방증이었다. 하긴 다 같이 놀러 왔는데 남자들과 아이들만 물장구를 치며 노는 걸 보면 억울하겠지. 안 그래도 평소에 콩쥐처럼 온갖 잡다한 일을 도맡아 하는 여인들이 아닌가. 이곳에서도 여인들은 차를 끓이고 음식을 준비하고 아이를 돌보고 수박을 자르느라 분주했다.
어느 하루는 우주선이라도 타고 날아온 듯 어디선가 금발의 여성 두 명이 나타나더니 옷을 하나둘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여성에게 쏠렸다. 대중 앞에서 여성이 실오라기 하나라도 벗어 맨살을 드러낸다는 건, 적어도 이 고장에서는 TV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일이었다.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속옷만 걸치게 된 그들은 거침없이 물로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물살을 가로지르며 더 깊은 곳으로 헤엄을 쳤다. 나는 멍하니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번개처럼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 여자들, 반대쪽 육지까지 헤엄쳐서 가려는 거구나!’
이곳에 도착한 날부터 나는 반대쪽 육지에 가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거리와 수심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반대쪽 육지까지는 대략 700m 정도의 거리가 있었고 호수의 가장 깊은 곳은 무려 535m나 되었다. 만약 헤엄쳐 가는 도중에 다리에 힘이라도 풀리게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했다.
하지만 이 순간, 나는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따라가야 했다. 나는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그들을 쫓아 헤엄을 쳤다.
두 육지 사이의 중간 지점쯤 왔을까. 작은 점처럼 보이던 두 여성은 어느샌가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사실을 깨닫자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더니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고 앞으로 나아가기에는 아직도 한참이나 더 가야 한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동안 호수 한복판에 부표처럼 두둥실 떠 있었다. 왔던 길을 수없이 되돌아보며 돌아갈까 망설였지만 그럴 수 없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겁쟁이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이걸 해낸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거 같았다. 반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그 무엇도 해내지 못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힘겹게 도착한 반대편 육지에는 예의 금발의 여성 두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플로리다에서 온 친구들로 자동차로 터키를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덧붙여 자기들을 ‘Professional fun haver’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들에게 물어보았다.
“나 사실 여기까지 헤엄쳐서 오는 게 되게 무서웠거든. 그런데 너희들은 아주 거침없이 나아가더라. 무슨 비결이라도 있니?”
“비결? 글쎄. 그냥 편안하게 생각해. 몸에 힘을 빼고 물속을 걷는다는 느낌으로 수영을 해 봐.”
돌아오는 길에 그 말대로 헤엄을 쳐보았다. 흐음, 잘 모르겠다. 힘든 건 매한가지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은 수월했고 내게 두려움은 없었다. 한 번 넘은 장애물은 더 이상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들이 내 양옆에서 함께 헤엄을 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무한한 용기와 힘을 얻었다. 우리는 무사히 출발 지점으로 돌아왔고 플로리다에서 온 Professional fun haver는 짧은 작별 인사를 남긴 채 다른 재미를 찾아 홀연히 떠나갔다.
보조바 휴양 공원은 여러모로 최적의 피서지였지만 딱 한 가지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가 있었다. 그건 바로 파리지옥. 이 빌어먹을 파리떼 같으니라고! 마틴과 나는 일심동체가 되어 온종일 파리떼와 전투를 벌이지만 물량 앞에 장사 없다고 부질없는 짓이었다. 얼마나 귀찮게 우리에게 달라붙던지 파리떼를 박멸시키기 위해 이 공원을 전부 불살라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지독한 파리떼는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버리고 간 쓰레기 때문이었다.
터키의 쓰레기 문제는 우리에게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다. 왜 터키 사람들은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는 걸까? 우리가 도출한 결과는 하나였다. 사람들의 문제의식이 약했다. 이 점만큼은 그 옛날 TV에 출연해 "터키 국민의 60%는 바보다"라고 폭탄 발언한 터키의 유명한 풍자작가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이 공원을 찾는 나들이객은 대부분 근처에 사는 주민이었다. 그런데도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사람처럼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고 갔다.
터키에서 만난, 배울 만큼 배운 어느 의사조차도 이런 말을 했다. "그게 어디로 가는 게 아니잖아." 맞는 말이다. 한 번 버려진 쓰레기가 어디로 가진 않겠지. 소각해서 대기오염을 유발하는 것보다 그대로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인간이란 영악한 존재라는 것이다. 누가 쓰레기를 버리면 나도 버리고 싶고 이미 쓰레기가 있는 곳에서는 쓰레기를 버려도 괜찮다고 믿는다.
쓰레기 분리배출도 문제였다. 큰 도시라면 모를까 대다수 마을에는 재활용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거 같았다. 음식물 쓰레기, 태울 수 있는 쓰레기, 페트병, 유리병 등 모든 종류의 쓰레기가 터키의 그 못생긴 철제 쓰레기통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쿠르반 바이람(희생절, 한국의 명절과 비슷한 공휴일) 때, 나는 이 철제 쓰레기통 위에 제물처럼 올려진 커다란 소 대가리도 보았다. 그건 그로테스크한 영화에나 나올법한 끔찍한 광경이었다.
우리는 파리떼에 시달리면서도 이곳에서 일주일이나 머물렀다. 나는 혼자서 보조바 시내로 나가 점심을 사 먹곤 했다. 어느 날 나는 라마준(Lamacun)을 사러 빵집에 들렀다. 라마준은 얇은 밀가루 반죽 위에 고기와 야채, 소스를 얹어 화덕에 구운 음식이다. 조리 방법이 피자와 비슷하지만 생김새도 맛도 꽤 다르다.
가게 안에는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빵을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외국인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굉장히 반가워했다. 라마준 세 개를 사고 돈을 내려고 했다. 직원이 “돈은 괜찮아. 그냥 가져가"라고 말했다. 이게 웬 횡재냐. 나는 고마움을 표시하고 룰루랄라 가게를 나왔다.
다음 날, 그 가게를 다시 찾았다. 미안한 마음에 이번에는 꼭 돈을 내고 라마준을 살 생각이었다. 한 개에 3리라 정도로 그리 비싼 것도 아니었고. 그러나 라마준은 다 팔리고 없었다. 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가게 직원은 그런 나를 보고는 하던 일을 멈추고 오직 나를 위해서 라마준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제 막 화덕에서 구워져 나온 따끈따끈한 라마준이 완성되고 나는 감동에 겨워 기꺼이 돈을 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돈을 받지 않았다. 강하게 항의하고 협박을 해봐도 그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공원으로 돌아온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대체 어떻게 하면 돈을 내고 라마준을 살 수 있을까? 총칼을 들이대며 돈을 주면 받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고민에 빠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나는 이 문제를 마틴에게 상의하기에 이른다. 마틴은 “그건 네가 미숙하기 때문이야. 내일 갈 때 나랑 같이 가자.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보여줄게”라며 자신 있게 말했다.
다음 날, 나는 마틴과 함께 길을 나섰다. 빵집 사람들은 또 다른 외국인의 등장에 마치 전쟁터에서 돌아온 친구와 재회라도 한 듯 흥분했다. 그들은 우리를 앉혀 놓고 다과마저 대접해 주었다. 라마준이 완성되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찜통 같은 더위에 맥이 풀린 건지 아니면 주위 사람들의 들뜬 분위기에 항복한 건지 마틴의 자신감 있던 모습은 점점 사라져 갔다. 그러더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흠, 이거 돈 못 낼 거 같은데?”
결국 우리는 그들에게 초콜릿을 선물하고 라마준을 받아왔다. 실패담을 들은 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니, 돈을 그냥 주고 오면 되는 걸 그걸 못 한단 말이야? 너희들 바보니?”라며 핀잔을 주었다.
아타튀르크 인공호수를 떠나는 날, 우리는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도 할 겸 그 가게를 찾았다. 베로는 돈에 관해서는 우리 중에서 가장 야무진 친구였다. 그런 그녀가 지금껏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하기 위해서 선봉에 섰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세상의 정의를 재건할 수 있을 거라며 기대를 높였다. 물건을 받고 돈을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과연 결과는?
그들은 마지막이라는 이유로 우리에게 라마준과 함께 에크맥(Ekmek, 터키인이 주식으로 먹는 빵. 바게트처럼 생김)과 시미트(Simit, 터키의 국민 음식. 보통 깨가 뿌려진 동그란 모양의 고소한 빵)까지 챙겨 주었다. 베로는 지갑을 열어 보이고는 “우리 돈 많아”라며 쇼까지 선보였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부처님처럼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 일화를 얘기할 때마다 사람들은 “왜?”라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대체 생면부지의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했던 이유는 뭘까? 한동안 고민하던 나는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모든 일에 “왜?”라는 질문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타인의 친절과 호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언젠가 나도 그 이상을 돌려줄 수 있기를 희망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