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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호 Jul 17. 2022

백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터키 9월의 어느 날 - E99 도로



- 날이 밝고 우리는 보조바 휴양 공원을 떠났다. 일주일 만에 자전거를 타는 거라서 그런지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현재 기온은 흐음, 말해서 뭐 하나. 여전히 죽을 死가 오감으로 느껴지는 섭씨 40도인걸. 일주일이나 피서를 떠났건만 더위는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떠난 지 삼십 분도 채 안 되어 전신에 땀이 줄줄 흘렀다. 벌써부터 휴양 공원의 맑고 시원한 호수가 그리워졌다.



E99 도로를 따라 시베렉(Siverek)으로 가는 길에 고즈넉한 풍경이 나를 반겼다. 수확이 끝난 옥수수밭의 생기 없는 노란 잎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나에게 인사를 했다. 태양이 떠오르자 그 잎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며 뜻밖의 아름다움을 연출했다. 옥수수밭을 지나자 아몬드 과수원이다. 마침 사람들이 작대기로 나뭇가지를 쳐가며 아몬드 수확에 한창이었다. 길 건너편에는 빨간 피망을 가득 실은 트랙터 운전사가 우리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잠깐 이리로 와 봐'라는 눈치였다. 미안하지만 그리로 갈까 보냐. 저런 거에 일일이 응답했다가는 십 년이 지나도 이 고장을 벗어날 수 없을지 모른다.


일곱 번이었다. 우리는 많게는 하루에 일곱 번이나 누군가에게 차이를 대접받았다. 좋은 말로 하면 대접이고 나쁜 말로 하면 목덜미를 잡혔다고 봐도 무방하다. 주유소에서 차이, 슈퍼마켓에서 차이, 신발 가게에서 차이, 모스크에서 차이, 나무 그늘 아래서 차이, 잔다르마와 차이, 경찰과 차이. 어딘가에 엉덩이만 붙였다 하면 차이 한 잔이 ‘짠’하고 나타났다. 차이를 마시는 것까지는 좋다. 살인적인 폭염 때문에 자주 휴식이 필요했고 터키의 차이는 언제 마셔도 맛있으니까. 문제는 뫼비우스 띠처럼 반복되는 질문이었다.


“어디에서 왔나?”, “터키에는 왜 왔나?”, “얼마나 터키에 머무는가?”, “이제까지 어디를 가봤는가?, "직업은 무엇인가?", "사진 찍어줄까?", "차이 한 잔 더 마시겠나?", "나이는 몇인가?", "결혼을 했나, 그것 참 안됐구나.”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나는 터키어를 몰랐지만 밥 먹듯이 반복되는 상황에 저 질문만큼은 터키인처럼 유창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사실 위의 질문들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30년 전 터키 동남부를 여행할 때 받았던 질문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30년이나 지났건만 놀랍게도 질문의 토씨 하나 바뀌지 않았다. 또 다른 30년이 지나면 어떨까? 무언가가 바뀔까?


반복되는 질문은 내 혼을 쏘옥 빼놓았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자리에 누워서 죽은 척을 했다. 사람들이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았다고 해도 나에게는 더 이상 말 한마디 섞을 기력이 없었다. 물론 그러다가도 음식이 나오면 벌떡 일어났다. 멜론을 먹고, 수박을 먹고, 차이를 마시고, 사탕 하나를 빨고 나서 다시 죽은 척을 했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말을 걸까 봐 모자로 눈을 가리고 마스크로 입을 막았다. 아무리 수다를 좋아하는 터키 사람이라고 해도 죽은 사람에게 말을 걸진 않을 테니까.


이런 망나니짓을 해도 쫓겨나지 않았던 건 순전히 마틴과 베로 덕분이었다. 이런 일이 적성에 맞는다고 해야 할까. 그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사람들과 어울렸다. 매번 반복되는 질문에도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래도 상황은 30년 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번역기 덕분에 우리는 때로는 심오하고 흥미로운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그중에는 이런 게 있었다.


쿠르드족 남자는 자신은 아내가 둘이고 자식이 13명이나 있다고 했다. 터키는 1926년 일부다처제를 법적으로 금지했다. 하지만 터키 동부에서는 여전히 일부다처제가 간간이 행해지고 있었다. 남자는 베로에게 아르헨티나에도 일부다처제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페미니스트인 베로의 답변이 기발했다.


“아내를 둘 갖고 싶으면 가지면 되지. 대신에 나도 두 명의 남편을 가질 거야.”


쿠르드족 남자는 베로에게 "그럼 안돼"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건 오직 남자만이 가능한 일이란다. 옆에 있던 호자(이슬람을 가르치는 선생)는 그에 대한 근거를 설명해 주었다. 남자의 영혼의 일부에는 알라가 있기에 남자는 아내를 둘 이상 가져도 된다. 하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 동시에 둘 이상의 남편을 갖는 여자는 알라의 분노를 사게 되리라.


'네가 하니까 나도 할 거야'라든가 '신이 남자에게만 내려주신 은총'이라든가 나에게는 다 엉터리처럼 들렸다. 아랍 세계나 유목민들의 일부다처제는 사회 구조와 시대 배경의 영향이 컸다.


 옛날, 남자들은 빈번하게 전쟁터에 나가야 했다. 전쟁에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못하면 남겨진 처자식들은 당장 먹고사는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여성의 경제활동이 극히 제한된 사회에서 그들이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재산이 많지 않은 여성은 살아가기 위해서 결국 다시 시집을 가야 했다. 보통 죽은 남편의 형제나 친척에게 몸을 맡겼다. 그들에게 이미 처가 있는 경우도 많았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전 남편을 잊고 다시 시집을 가야 했던 여자의 마음은 얼마나 착잡했을까? 반면 남자의 마음은? 새로운 여자를 안을 수 있다는 욕망에 가슴이 벌렁거렸을까? 아니면 먹여 살려야 하는 식구가 늘어난 데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을까?


'내 마음의 낯섬'이라는 책에는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메블루트는 가끔 우리 둘 중 한 명에게 가게에서 조수한테 지시하는 사장처럼 "저 컵 좀 치워"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한테 한 말이면 왜 나만 시키고 사미하는 시키지 않지 하고 화가 난다. 사미하한테 한 말이면 저 애가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군 하며 짜증이 인다. 메블루트는 내가 질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였다면 아내들끼리 잘 지내기를 간절히 소망했을 거 같다. 아내들의 반목이나 서로에 대한 질투만큼 남편으로서 난처한 일도 또 없을 테니까. 일부다처제이던 일처다부제이던 결국 우리가 바라고 하늘이 바라는 건 가정의 화목과 안정이 아닐까 싶었다.



비록 지루함에 진저리를 치며 죽은 척까지 했지만 우리에게 차를 대접해 준 사람들은 천생 순박한 시골 사람들이었다. 신과 가족, 일, 그리고 이웃과 나누는 차이 한 잔의 여유가 그들이 사는 세상 전부인 거 같았다. 욕심 많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부족함이 왜 없겠냐만 마음먹기에 따라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조건은 모두 갖춘 셈이었다. 어쩌면 이만큼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만약 지금이 행복하다면 바꾸고 싶은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변하냐 변하지 않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변하는 걸 원하냐 원하지 않느냐’였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기에 빛나는 가치를 지닌 것들이 있다. 이 사람들이 앞으로도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길 바란다. 30년 후에도 지금처럼 차이를 대접해 주며 말 한마디 건네준다면 그때는 나도 죽은 척 대신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웃어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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