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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호 Jul 12. 2022

이번 마르딘 여행이 가장 기대가 돼

터키 8월의 어느 날 - 마르딘



- 며칠 전 길에서 만난 터키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터키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어디야?”
“글쎄. 이스탄불도 좋고 카파도키아도 좋았는데 사실 이번 마르딘 여행이 가장 기대가 돼."


카르스에서 지내면서 나는 오직 마르딘만 생각했다. 인류가 최초로 정착한 고대 도시,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얽혀 살아가는 융합의 도시, 드넓은 메소포타미아 평원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산악도시 등 마르딘의 그 무수한 수식어는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랬던 마르딘이 이제 코앞에 있었다. 내 마음은 첫 데이트를 앞둔 것처럼 들떴다.


마르딘 구시가지에 도착한 우리는 호텔에 짐을 풀어놓고 구경에 나섰다. 바깥 날씨는 이 시기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언제나 그렇듯 아기 피부처럼 티 없이 맑았다.



마르딘은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흥미로운 곳이었다. 돌로 차곡차곡 쌓아둔 담, 특이한 모양의 대문, 찰리 채플린과 샤흐메란(Sahmeran, 쿠르드족 전설에 나오는 뱀 여인으로 액막이 효과가 있다고 함) 등을 그려놓은 벽화, 바구니나 드럼통에 심어놓은 식물, 이런저런 조형물들과 수줍음을 많이 타는 길고양이 등 온갖 것들이 눈을 즐겁게 했다.


언덕의 경사면을 따라 형성된 마을은 흙벽돌로 지은 오래된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집들 사이로 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우리는 몇 번인가 길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이곳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노타우루스처럼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괴물이 사는 미궁이 아니었다. 머리 위로 메소포타미아의 넉넉한 햇살이 가고자 하는 길을 환히 비춰주었고 길을 물으면 지역 주민들은 언제나 친절한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구시가지를 둘러본 우리는 카시미예 이슬람 신학교를 방문했다. 건물 내부에는 그 옛날 과학자들이 썼을 법한 여러 가지 과학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슬람은 우리의 편견과 달리 예부터 과학기술을 신이 창조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하나의 진리라고 여기고 부지런히 연구해왔다. 아바스 왕조와 오스만 시대에 이슬람의 과학기술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했다. 특히 수학과 천문학, 약학의 발전은 독보적이었다. 예를 들어 아라비아 숫자와 영의 개념,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태음력은 이슬람 과학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영광과 번영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난 거 같았다. 전시실에는 먼지만 쌓여 있었고 누구도 그곳에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사진 찍기였다. 과거에 학자들과 학생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신만을 염원하던 신성한 장소가 이제는 사진을 찍기 위한 수많은 관광객으로 북새통이었다. 내게는 의외로 이런 사람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누군가 터키의 서부 지역과 동부 지역의 생활양식의 차이는 터키와 미국의 그것만큼이나 크다고 했다. 나는 그들의 차림새를 보면서 이 말을 실감했다. 선글라스와 반팔, 반바지, 어깨가 다 드러나는 원피스, 민소매, 화려한 옷 등을 입은 사람들은 보나 마나 터키의 서부나 지중해 근처 출신임이 틀림없다. 반대로 머리에 히잡을 두르고 온몸을 가리는 수수한 드레스를 입은 사람들은 터키 동남부 출신일 것이다.


방문객 중에는 웨딩 화보를 찍으러  신랑과 신부도 있었다. 신부의 들러리 중에는 연한 장미색의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 있었다. 알라딘의 자스민 공주를 닮은 그녀는 신부보다도  빛이 났다. 그런 그녀가 아까부터 나를 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여자가 나를 쳐다보면 대단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여자가 나한테 관심이 있구나! 나는 베로의 옆구리를 슬며시 찔러보았다.


"저 여자가 나를 자꾸 쳐다보는데? 나한테 관심이 있나?"


베로는 그녀를 보더니 말도  된다는  고개를 저었다.


"누구? 저기 저 여자? 에이, 설마."
"진짜야. 눈도 몇 번 마주쳤어."
"에이, 그럴 리가."


나는 속상했지만 그 여자에게 가서 멱살 잡고 '너 나 쳐다봤지?'라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 여자는 뚜벅뚜벅 우리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으니까. 내 머릿속이 까매졌다. 아무리 나한테 관심이 많아도 그렇지 다짜고짜 이렇게 다가올 줄이야. 그녀에게 뭐라고 첫마디를 건네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 나 쳐다봤지? 이건 아니다. 너 나 좋아해? 이건 더더욱 아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답을 제시했다. "메라바”라고 인사를 한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너희들 외국에서 왔니?”
“우리는 아르헨티나에서 왔고 이 친구는 한국에서 왔어. 너는 저기 신랑, 신부랑 같이 온 거야?”
“응. 신부가 내 친한 친구야.”


그녀는 아까부터 (내가 아닌) 우리를 곁눈으로 훔쳐보았다고 순순히 실토했다. 메르신에서 관광업계에 종사하는 그녀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최근에 이 지역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거의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를 보고는 너무나도 궁금한 나머지 이렇게 말을 걸어오게 되었다고.


그녀는 터키에서는 결혼식을 마치고 웨딩 화보 촬영을 하며, 신부의 가족과 친구들이 따라가서 이런저런 일들을 도와준다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신부를 바라보았다. 순백의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신부지만 어째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너무 진한 화장 때문이다. 터키 여성들은 화장을 진하게 하는 편이지만 글쎄... 저건 도가 너무 지나친 거 같았다.


석양이 질 무렵 우리는 마르딘 성채를 찾았다. 산꼭대기에 위치한 마르딘 성채는 마르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마르딘이란 이름도 성채를 의미하는 시리아어 메르딘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성채 안으로 입장은 불가능했다. 성채 주변으로는 수많은 묘지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조각된 석재 묘지를 보고 있자니 죽음을 둘러싼 이슬람의 흥미로운 신화가 떠올랐다.


죽은 자는 자기가 죽은 줄을 모른다. 장례식날 죽은 이를 묻고 난 후, 장례식에 모였던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하면 죽은 자 역시 집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다가 관 뚜껑에 머리를 부딪치면 그제야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묘지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걷다가 적당한 장소를 찾았고 그곳에서 야경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야경이었다. 마틴과 베로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말하길, 지구상의 모든 지형을 볼 수 있다는 그 경이로운 파타고니아에서조차도 이만큼 드넓은 평야와 지평선은 찾아보기 힘들단다.


밤이 깊어갈수록 밤하늘에는 별이, 메소포타미아의 평원 위에는 황금색 불빛이 하나둘 떠올랐다. 고흐는 일찍이 밤의 색깔이 낮의 색깔보다 더 풍부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만약 이 풍경을 보았더라면 ‘별이 빛나는 밤’에 준하는 또 다른 역작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일렁이는 불빛 하나하나에는 생명이 깃들어 자기만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거 같았다. 어떤 불빛은 화목한 터키 가정의 풍성한 식탁을 환히 밝혔고 어떤 불빛은 기나긴 하루를 끝내고 귀가하는 이의 길잡이가 되었다. 어떤 불빛은 성냥팔이 소녀처럼 절망하는 이의 희망이었고 어떤 불빛은 집시처럼 떠도는 누군가의 친구였다.


나는 마틴과 베로에게 둘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 그들에게서 백 보쯤 떨어진 곳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귀에다가 이어폰을 꽂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인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OST를 들으며 야경을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음악과 눈부신 풍경이 나를 기억 저편의 아득한 곳으로 이끈다. 이럴 때면 꼭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지만 다음 생이라면 모를까 현세에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사람. 하늘에 계신 우리 엄마.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엄마와 떨어져 살게 되었다. 엄마는 다시금 우리 남매와 함께 살기 위해 손이 불어 터져라 열심히 일했지만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하셨다. 새벽녘, 사고 현장으로 찾아가는 길은 유난히 어둡고 적막했다. 마치 꿈속을 달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때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 쉽게 죽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스물두 살 때의 일이었다.


엄마의 죽음을 확인했을 때 나는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무덤덤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그런 나를 보고 이미 얼굴이 눈물로 얼룩진 누나가 말했다. 엄마가 죽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냐고. 하지만 그때의 나도 누나도 몰랐던 게 있었다. 나는 앞으로 수없이 많은 날을 엄마를 생각하며 혼자서 흐느낄 거라는 걸. 잠 못 이루는 밤 베개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사랑만큼 드넓은 풍경 앞에 마음을 묻고 애처롭게 흐느낄 거라는 걸.


참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엄마가 더 그리워진다. 엄마의 부재가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오고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항상 눈물이 흐른다.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 많지만 가장 후회되는 일은 언제나 똑같다.


언젠가 거리에서 엄마가 내 손을 꼭 잡았는데 나는 남사스러워서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대체 왜 그랬을까? 불운과 고생으로 점철된 엄마의 손을 꼭 잡아주고 위로해 주기는커녕 뭐가 부끄럽다고 매몰차게 뿌리쳐 버리다니. 그때 엄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면 혹시 많은 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항상 나를 안아주시던 엄마. 내가 그녀를 먼저 안아줄 수 있을 만큼 철이 들었을 때 그녀는 내 곁에 없었다. 나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몰랐고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 것이다. 그 사실이 나는 사무치게 슬펐다.


지금도 누군가 친근하게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는 건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비밀이겠지.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잠시라도 볼 수 있다면 그녀의 손을 꼭 잡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엄마,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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