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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호 Jul 25. 2022

서로 다른 두 명의 호스트

그래서 그 남자 정체가 뭔데?

터키 10월의 어느 날 - 타르수스(Tarsus), 메르신(Mersin)



- 아침에 일어나 텐트의 방충망을 보니 수십 마리의 모기가 달라붙어 있었다. 어떻게든 방충망을 돌파하려는 녀석들의 부질없는 노력을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모기들아, 아주 약 올라 죽겠지?

 

어젯밤은 모기 때문에 잠을 설쳤다. 비몽사몽 중에 텐트를 살펴보니 방충망이 조금 열려 있었고 모기들은 나를 두고 피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피는 피를 부르는 법. 사실 텐트 안으로 들어온 모기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숨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모기 DNA 정보의 가장 큰 결핍은 '치고 빠지는 전술의 부재'일지도 모른다. 모기들이 내 피를 적당히 빨고 퇴근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내 손에 피를 묻힐 일도 없었을 텐데. 만족을 모르는 삶의 끝은 파멸만이 기다릴 뿐이다.


나는 방충망의 지퍼를 끝까지 올린 후 핸드폰의 플래시를 켰다. 이 방면으로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임을 천명하며 마지막 만찬을 즐긴 모기들을 하나둘 때려잡기 시작한다. 부수고 짓밟고 빠개고 찌부러트리고 박수를 치며 짝! 모기도 하나의 생명일진대 희열마저 느끼는 걸 보면 나도 극락왕생하긴 글렀을지도. 어쨌든 채 삼 분이 안 되어 피의 복수를 완료한 나는 다시 찾아온 평화 속에 잠이 들었다.


우리는 그날 타르수스(Tarsus)의 웜샤워 호스트를 방문했다. 웜샤워는 자전거 여행자들에게 무료로 숙박과 지역 정보를 제공해 주는 커뮤니티이다. 바데는 사회학 박사 학위를 준비하는 36살의 독신녀였다. 천연 곱슬머리가 아름다운 그녀는 산시로라고 불리는 고양이와 함께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나는 고양이에게 왜 산시로라는 일본식 이름을 붙였는지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일본 홋카이도에서 지낼 때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거든. 거기서 따온 이름이야.”
“홋카이도에는 어쩐 일로 갔어?"
“일본어를 배우고 싶었어. 홋카이도의 소수민족에도 관심이 있었고. 뭔가 우리 쿠르드족이랑 닮았더라고.”


홋카이도에는 아이누족이라는 소수민족이 있다. 수년 전 홋카이도를 여행할 당시 나는 아이누족의 전통무용을 관람한 것을 계기로 이들에게 흥미를 가진 적이 있다. 아이누족은 내가 만난 최초의 소수민족이었고 쿠르드족은 내가 가장 오랫동안 부대낀 소수민족이었다. 두 민족 모두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지만 서로 간의 연결고리 따윈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어디까지나 독립적이며 그들만의 특수한 상황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바데의 그 ‘닮았다’라는 한 마디는 동전을 뒤집듯 내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두 민족 모두 토착민으로서 독자적인 언어와 고유의 문화 그리고 풍부한 생활양식을 영위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이누족은 19세기 말 일본의 범아시아주의 앞에, 쿠르드족은 20세기 전반에 걸쳐 터키의 민족주의라는 기치 아래 지배 세력의 탄압을 받게 된다. 그들 고유의 언어 사용은 금지되고, 문화는 배척당하고, 사회적인 차별마저 받았다. 두 민족 모두 빼앗긴 권리를 회복하고 고유문화를 지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 덕분인지 아니면 정치적인 이유 때문인지 현재는 쿠르드족도 아이누족도 국가로부터 소수민족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지만 고유 문화를 지켜나가기 위한 첫걸음을 뗀 셈이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왠지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던 일들은 일제강점기 하에 우리도 똑같이 겪은 일들이 아니던가?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분단은 되었을지언정 독립을 이룩한 것일 테다. 독립은 쿠르드족에게도 아이누족에게도 공통된 꿈이었다. 하지만 쿠르드족은 인구는 충분했으나 경계를 그을 명확한 땅이 없었고 아이누족은 땅은 있었으나 그 땅을 지킬 인구가 충분치 못했다. 물론 자신의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국제 사회의 위선적인 태도도 크게 작용했다. 사자와 호랑이가 지배하는 잔혹한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길 잃은 어린 사슴이 설 자리는 없으니까.


힘없는 소수민족의 고통과 억울함은 인류사의 비극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시간은 인간의 상처를 치료하듯 시대의 상처도 치료하나 보다. 내가 만났던 대다수의 아이누족은 자신 있게 스스로 일본인이라고 지칭했던 기억이 난다. 바데 또한 “너는 쿠르드인이야 아니면 터키인이야?”라는 내 물음에 “나는 쿠르드인이자 터키인”이라고 분명한 답변을 주었다.


다음 날, 바데와 작별인사를 하고 우리는 메르신(Mersin)으로 향했다. 메르신에는 또 다른 웜샤워 호스트인 에므레가 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6층 아파트 꼭대기 층에 친구와 함께 살고 있었다. 모든 게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바데의 집과는 달리 이 집은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특히 각종 식물이 꽉 들어선 넓은 베란다는 마치 열대우림을 방불케 했다. 에므레가 혹시 식물학자인가, 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에므레는 짐을 풀어놓은 우리에게 다짜고짜 잼을 만들 과일을 따러 가지 않겠냐고 물었고 우리는 그를 따라나섰다. 자전거로 20 정도를 달려 도착한 곳에는 녹음과 갈대가 우거져 있었다. 드문드문 감나무와 귤나무가 심어 있고  그루의 레몬 나무도 보였다. 도심 외곽에 자리한 그곳은 비밀정원처럼 인적이 없는 은밀한 장소에 숨어 있었다. 나는 에므레에게 물었다.

 

“여기가 너의 텃밭인가 봐?”
“내 텃밭 아니야.”
“그래? 근데 이렇게 막 들어와도 괜찮은 거야?”
“괜찮지 않을까?”


이런 멍청한 질문을 하고 있다니 나도 참 답답한 인간이다. 그는 이곳에 도착한 이후, 수박 서리를 하는 아이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는 우리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고 까치발을 들었다. 침묵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우리는 가지고 온 봉지에 감과 귤을 주워 담았다. 반면, 에므레는 귤나무의 나뭇가지를 자르고 있었다. “뭐 하고 있는 거야?”라고 물어보니 이걸 집에 가져가서 화분에 심는단다. 내년쯤이면 집에서 귤을 따먹을 수 있을 거라면서. 나는 이 남자의 정체가 조금 궁금해졌다.


에므레는 과일 따는 걸 도와줘서 고맙다며 우리에게 저녁을 만들어 주었다. 뭘 만들었을까, 기대를 품고 뚜껑을 열어 보니 에게? 고작 완두콩 껍질 요리? 완두콩 요리도 시원찮은데 그 껍질 요리라니... 그러나 돼지껍질만 맛있는 게 아니었다. 토마토소스에 볶은 완두콩 껍질 요리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그건 내 생애를 통틀어 남자가 만들어 준 음식 중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 직접 담갔다는 오이 피클은 토마토소스의 텁텁한 맛을 달래며 요리와 훌륭한 콤비를 이루었다. 나는 입에 침을 튀겨가며 그의 요리를 칭찬했다. 요리를 어떻게 배웠냐고 그에게 물었더니 딱히 배운 건 아니란다. 배우지도 않았는데 이런 맛이 나다니. 나는 이 남자의 정체가 점점 더 궁금해졌다.

 

저녁을 먹은 후 우리는 거실에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에므레는 어디선가 흰 포장지에 돌돌 쌓인 물건을 가져오더니 그 안의 내용물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헉! 대마초였다.  


터키는 쾌락을 하나의 악으로 여기는 이슬람 국가답게 대마초 사용을 엄격히 금지한다. 다만 의약품과 과학 연구를 목적으로 자국 내 대마초 재배를 허락하고 있는데 이렇게 생산된 대마초의 일부가 암시장에서 거래된다. 아다나 케밥으로 유명한 아다나에서 소비되는 대마초가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메르신은 아다나의 이웃 도시이다. 즉, 여기서 대마초를 손에 넣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대마초를 앞에 두고 아르헨티나에서 온 마틴과 베로는 환호성을 질렀다. 어련하실까. "고향에서 가장 그리운 게 뭐야?"라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대마초!"라고 부르짖던 친구들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사적 공간에서 소량만을 사용한다는 전제하에 대마초를 허용한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곤혹스러웠다.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순 없었던 나는 결국 베로가 만들어 준 마테차를 홀짝였고 나머지는 대마초를 피며 에므레의 탄부르(Tanbur, 이란의 전통악기) 연주를 감상했다.


에므레의 연주는 수준급이었다. 나는 악기에 대해서는 목불식정이지만 한눈에 봐도 하루 이틀 연습한 실력은 아니었다. 귀 기울여 그의 연주를 듣다 보니 문득 스쳐 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이제 보니까 이 친구, 생긴 것도, 허름한 차림새도, 자유분방한 태도도 영락없이 수피(Sufi)를 닮았다.


수피는 이슬람 신비주의를 믿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그 옛날 수피들도 종교의식을 위해 대마초를 사용하고 악기를 연주하지 않았던가. 영적 수행을 위해 방랑을 자처하던 수피들도 에므레가 구사하는 훌륭한 영어처럼 외국어를 잘했을 거 같고 또한 길을 가다가 누구 것인지 모를 과일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라며 죄책감 없이 따 먹었을 거 같고.


아쉽게도 나는 그에게 ‘너 혹시 수피야?’라고 물어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런데 아쉬운 사람은 나 혼자만은 아니었나 보다. 다음 날, 그의 집을 떠나자마자 마틴은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그래서 그 친구 정체가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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