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9월의 어느 날 - 말라티아(Malatya)
- 고고학자들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에덴동산이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 어딘가일 거라고 추정한다.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관통하는 D300 도로를 따라 말라티아로 향하고 있던 나는 이곳이 에덴동산일 거라고 확신했다. 도로 양옆으로 과수원이 아마존 밀림처럼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주렁주렁 맺힌 석류와 무화과 열매가 얼마나 탐스럽던지 몰래 하나 따고 싶은 걸 꾹 참는다. 괜히 허락되지 않은 걸 따먹었다가 아담과 이브 꼴 나면 안 되겠지. 그런데 내 앞에서 달리고 있던 마틴은 살며시 손을 내뻗더니 나뭇가지에 달린 석류 하나를 슬쩍한다.
“마틴! 너 또! 그거 절도라니까!”
소리를 치고는 있지만 내심 손해를 보는 느낌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물건이 없어지면 그건 도둑 탓이기도 하지만 관리를 소홀히 한 주인 탓도 크다고? 마틴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지만 나는 역시 양심에 찔렸다. 뭐 저렇게 딴 과일들은 항상 함께 나누어 먹곤 했으니 나는 이미 공범이겠구나. 그렇다면 사랑하는 동료여, 부디 걸리지만 말게.
말라티아는 살구의 고장이다. 전 세계 말린 살구 생산량의 80%가 이곳에서 나온다. 도로변의 가판대에는 다양한 종류의 말린 살구를 팔고 있었다. 어떤 건 청명한 주황색을 띠는 반면 어떤 건 자동차 타이어처럼 거무스레하다. 물어보니 어떻게 말리느냐 그리고 유기농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색깔이 다르다고 한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고 했다. 청명한 주황색을 띠는 게 더 맛있지 않을까? 꼬마 주인은 고개를 젓는다. 거무스레한 게 더 맛이 좋단다.
살구 20리라어치를 사고 나자 내 식료품 가방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안에는 살구 이외에도 무화과, 토마토, 오이, 배, 당근 등이 가득하다. 과일을 별로 안 좋아하는 나였지만 터키에서는 달랐다. 터키에 오고 나서 나는 아담과 이브가 대체 어떻게 과일만 먹고 살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특히 제철을 맞은, 그 저렴하고 크고 맛이 좋은 수박과 체리는 '그냥 이대로 터키에 눌러앉아버릴까?'라는 진지한 물음을 내게 던졌다. 그래서 내가 하고픈 말은 말이지, 터키에서 과일을 안 먹는다는 건 뭐랄까. 유목민이 고기를 안 먹고, 뱃사람이 생선을 안 먹는 것과 비슷한 느낌? 한 마디로 죄입니다.
말라티아에는 웜샤워(Warmshower) 호스트인 패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패티는 군대의 헬기 조종사로 중학교 수학 교사인 아내 그리고 두 아이와 함께 군인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의 집은 아담했고 현대적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패티의 취미는 그림 그리기, 사이클링 그리고 맛집 탐방. 그녀의 아내 베이자의 취미는 독서와 요리 그리고 영어 공부. 터키의 아주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이 딱 이 느낌이려나?
저녁 시간이 다가왔고 내 심장은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젠장맞을, 어쩌다가 내가 오늘 저녁의 주방장이 되었을까. 이게 다 내 입방정 때문이다. 아시아의 조미료를 찾기 위해 터키 전역의 슈퍼마켓을 이 잡듯 뒤지던 나는 마침내 말라티아의 Migros에서 굴소스와 간장을 발견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나는 그 자리에서 “오늘부터는 내가 요리사"라고 외쳤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마틴은 악마처럼 내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모두가 모여 있는 자리에서 돌연 "그럼 오늘 저녁은 네가 만들어 주는 거지?"라고 내게 물었고 사람들은 즉각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속으로 울상을 지으며 마틴을 저주했지만 빠져나갈 구멍 따윈 없었다.
뭘 만들지 고민하다가 선택한 요리는 닭찜. 베이자는 자진해서 나를 도와주었다. 아니, 좋게 말하면 도와준 거고 나쁘게 말하면 감시라고 해야 할까? 요리에 요 자도 모를 거 같은 말라깽이가 그녀의 주방을 빌려 쓰며 찬장이란 찬장은 다 열어젖히고 있었으니 아마 살림살이가 거덜이 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겠지. 뒤통수가 많이 가려웠지만 나는 우직하게 닭찜을 만들었다. 그러던 중, 야채 다듬는 걸 도와주던 베이자가 내게 말했다.
“감자는 다 깎았고 나는 이제 버섯 껍질 벗길게.”
응?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한동안 귀를 파지 않았더니 청각에 문제가 생겼나? 혹시나 해서 뒤를 돌아보았더니 그녀는 정말로 버섯의 껍질을 정성스레 벗기고 있었다.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장 내일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한다고 해도 이보다 더 놀랍진 않을 거 같다. 예전에 ‘버섯을 씻어? 말아?’로 대만 친구와 일본 친구가 서로 대판 입씨름을 한 적이 있는데 이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녀 말로는 버섯의 갓을 한 번 벗겨내면 더 깨끗하다나. 아까는 슈퍼마켓에서 사 온 닭을 보고는 "너 그거 믿고 먹을 수 있어?"라고 묻더니만. 식품 안전과 위생에 무척이나 까다로운 그녀였다. 닭찜에 설탕을 투하하는 나를 보고는 "음식에 설탕을!"이라며 가늘게 탄식을 내뱉기도 했다. 나는 당면 대신 넣으려고 사 온 인스턴트 라면을 손에 들고는 이걸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세계 최초의, 껍질 벗긴 버섯이 들어간 찜닭이 완성되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내 앞에서 패티와 베이자는 새신랑, 새신부처럼 흥분 도가니다. 찜닭의 비주얼이 마음에 드는지 사진도 찍어대고 입이 귀에 걸려 있다. 그래, 어서 와. 한국 요리는 처음이라고 했지?
사실 외국인 친구에게 한국 요리를 만들어 주는 건 내게 있어 큰 즐거움이다. 하지만 동시에 긴장되는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난생처음 접하는 한국 요리가 아닌가? 한국의 맛이 과연 세계로 뻗어나갈지 아닐지가 지금 내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시험지를 받아 든 학생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약 별로라고 하면 그놈은 천하의 머저리인 거고 맛있다고 하면 이 친구 뭘 좀 먹을 줄 아는 거다.
다행히 아이들을 포함해 모두 맛있게 먹어 주었다. 나는 큰 보람을 느꼈고 특히 베이자가 아이들에게 라면을 먹이는 걸 보고는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저녁 식사 후 우리는 거실에 모여 두런두런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패티와 베이자는 고등학생 때부터 사귀기 시작하여 취업 후 결혼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만나 친구에서 연인으로, 더 나아가 부부 관계로 발전하는 사람들의 일화는 언제나 부럽다. 그들의 길고 긴 사랑 이야기에는 마치 첫사랑이 이루어진 듯한 애틋함이 서려 있다. 오랜 세월 끝에 마침내 결혼이라는 아름다운 결실을 맺기까지 얼마나 많은 갈등과 우여곡절이 있었을까?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신뢰 그리고 약간의 운이 없었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내 주변의 이런 과정을 거쳐서 결혼한 부부는 매우 행복해 보였고 그건 패티와 베이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베이자에게 코로나가 한창인 요즘, 학교 수업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학교에 가지 않고 원격으로 수업을 하고 있어.”
“학생들이 모두 원격 수업에 필요한 도구를 갖고 있어? 컴퓨터나 노트북 같은 거?”
"아니. 가지고 있지 않은 학생들도 많아.”
“그런 아이들은 어떻게 하는데?”
“수업을 못 듣는 거지.”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나는 그 속에 감춰진 옅은 패배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어려운 터키 경제인데 최근에 코로나 때문에 관광사업이 무너지면서 경제가 더욱 나락에 빠졌다. 당장 생계에 위협을 받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의 교육까지 신경 쓰기에는 정부 차원에서도 가족 차원에서도 무리가 아닐까? 그렇다고 할 지라도 가난한 아이들로부터 교육의 기회마저 박탈해 버리면 그 아이들은 대체 어디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대화의 주제는 어느새 문학으로 흘러갔다. 술이 조금 들어갔기에 우리 모두 알딸딸한 상태였다. 최근에 오르한 파묵의 소설을 읽고 있다는 내게 베이자는 상기된 얼굴로 "오르한 파묵은 거짓말쟁이야!"라고 외친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이 터키에서 거짓말쟁이가 된 이유는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둘러싼 그의 정치적 발언 때문이다. 그가 터키를 떠나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은 터키와 아르메니아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도 논란이 되는 뜨거운 감자이다. 사건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터키 공화국에서 일어났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 고유의 행정제도인 밀레트 제도 아래, 자신들의 종교인 그리스 정교회를 믿으며 비교적 평화롭게 살아왔다. 하지만 19세기 말부터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는 기존 질서에 변화의 불씨를 지핀다. 그러던 중,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발발과 민족 자결주의의 부상을 계기로 터키 내 아르메니아인들의 독립 문제가 불거지고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들 사이에 극도의 긴장이 조성된다. 그 결과, 크게 두 차례에 걸쳐 다수의 무슬림과 정부 조직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이 일어난다. 조사 주체에 따라 최소 20만 명에서 최대 200만 명까지 희생되었다는 이 사건은 홀로코스트에 비견되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터키와 아르메니아는 여전히 이 사건을 둘러싸고 분쟁 중이고 두 나라 사이의 국경은 굳게 닫혀 있다.
요약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간단하게 서술했다. 모든 문젯거리가 그렇듯 아르메니아 집단학살도 자세히 들어가면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단순히 특정 집단의 잘못이라고 치부하기엔 당시 시대 배경이 너무나도 복잡하다. 그렇기에 나는 베이자의 외침과 강경한 태도에 침묵했다. 그녀가 집단학살의 진위 여부를 부정한 건지, 학살자 수를 부정한 건지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녀의 외침에 토를 단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내 앞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를 해치면서까지 옥신각신할 정치적 문제 따위는 없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어찌어찌 내 입장을 관철하더라도 그게 정말 정의를 위해서인지 단순히 말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의 지식이란 그만큼 얄팍하며 사람 간의 관계는 유리처럼 깨져버리기 쉬운 법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터키에서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은 결코 언급해서도, 열어서도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였다.)
문득 창밖을 내다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대체 얼마 만에 보는 빗방울이지? 그러고 보니 가장 최근에 비가 왔을 때도 이렇게 지붕 아래서 터키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 그때도 참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패티와 베로는 여성 인권 문제를 둘러싸고 불꽃 튀는 토론 중이었다. 공기 중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서로 단 한 치도 물러서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두 발 뻗고 팔짱을 낀 상태로 그들 사이에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왜냐하면 그 둘의 토론은 깜찍한 왈라비의 싸움을 보듯 아주 평화롭고 이성적인 토론이었으니까.
하지만 피 터지는 주먹다짐이 승부의 결착은 빠른 법이다.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앉아 있던 나는 밤이 깊어가도 끝나지 않는 토론에 백기를 들었다. 고단함이 몰려왔고 자러 가려고 엉덩이를 뗀 순간이었다. 베로가 덥석 내 팔을 잡더니 나를 다시 앉힌다. 그러고는 '이 중요한 때에 어디를 가려고?'라고 말하는 듯 눈에 불을 켜고 묻는다.
"두호. 그래서 너는 이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