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도와줄 수 없어.
2020년 3월, 어느 화창한 날의 기록.
-나는 지금 이스탄불의 위치한 국공립 병원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스탄불 세관에서 소포(한국에서 처방 받은 전문의약품)을 찾고 싶다면 현지 의사가 발급해 준 처방전을 갖고 오란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병을 설명하는 아무런 증거도 없고 터키어를 일도 못 하는 상황에서 이 임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여행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약이었기에 나는 착잡한 심경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병원으로 가는 길이 마치 자전거를 타고 파리에서 이스탄불까지 온 길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나는 반년 전 이번 여행을 시작한 이후 찾아온 가장 큰 미션에 도전하고 있었다.
한 시간 반 정도를 걸어서 도착한 병원은 입구에서부터 수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이런...씁... 사람이 덜 붐비기를 바라며 일부러 평일 오전 시간을 골라서 왔건만.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고 당장이라도 발걸음을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부딪칠 수밖에 없다.
정문 현관의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방글라데시에 온 거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일 층 대합실에는 어디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도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내게 일제히 집중되었다. 나는 대역죄인이라도 된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뒤통수로 쏟아지는 시선과 수군거림을 애써 외면하며 정면에 보이던 화장실로 대피했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이유는 명확했다. 당시 중국과 한국에서 코로나가 무서운 기세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리고 보아하니 나는 병원의 유일한 동양인 외국인이었다.(터키 사람들은 극동 사람들을 기똥차게 알아본다.) 외국 병원을 방문하는데 있어서 이보다 완벽한 타이밍이 있을 수 있을까? 실수로 재채기라도 크게 했다가는 동물원의 숫사자가 탈출한 것과 같은 상황이 일어날 지도 모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세면대 거울을 보자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손과 겨드랑이는 이미 땀에 젖어 축축했다. 아랫배도 살살 아파왔다. 나는 손을 깨끗하게 씻고 겨드랑이 냄새를 한 번 확인(?)한 후 크게 심호흡을 한 뒤 화장실을 박차 나왔다.
접수를 하기 위해 줄을 서자 곧 어떤 남자 직원이 내게 터키어로 말을 건네 왔다. 나는 'Tugsha'가 적어준, 내 상황을 설명하는 메모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Tugsha는 내 에어비엔비 호스트이다.) 그는 메모를 보고 난 후 A4용지에 뭔가를 적더니 나에게 건네주며 B동의 이 층으로 가라고 했다. '오!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는 거 같은데?'
B동은 바로 옆 건물이었다. 이 층의 접수대 앞에는 여름방학을 맞은 놀이공원에서 볼 법한 긴 대기줄이 형성되어 있었다. 나는 무려 15분이나 줄을 서고 기다린 끝에 접수대 앞에 설 수 있었고 당당한 태도로 접수대 직원에게 방금 전 남자에게서 받은, 메모가 적힌 A4용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게 무어라 말을 건넸는데 곧 내가 터키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알고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 메모가 적힌 A4용지가 필시 '도라에몽'에 나오는 '만능카드' 정도의 효과가 있을 거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던 나는 예상치 못 한 전개에 적잖이 당황했다.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확실했다. 그건 '나는 너를 도와줄 수 없어.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사람은 벼랑 끝에 서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법이다. 천성적으로 굉장히 수줍은 나였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뭐라도 해야만 했다. 나는 접수원의 돌아가라는 권유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꼼짝 않고 버티고 서 있었다. 그리고는 어차피 말이 안 통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영어로 필사적으로 내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여자가 좀 당황해 했지만 그뿐이었다. 절망감이 서서히 마음 속에 스며들기 시작할 때 기적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갑자기 백발이 성성하고 깡마른 노인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노인은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이 비상한 노인은 A4용지의 메모를 슬쩍 보고 난 후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곧 모든 상황이 파악되었다는 듯 접수원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젊은이. 접수원이 말하기를 자네 엉뚱한 곳을 찾아왔다더군. 이 층이 아니라 일 층으로 가야 한대. 미안한데 나는 아직 여기서 볼 일이 남아있어. 먼저 일 층에 가서 접수를 하고 있으면 볼 일을 마치고 곧 합류하지. 괜찮겠나?”
괜찮고 자시고 너무나 고마워서 나는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노인은 내가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내가 헛것이라도 본 건가? 참으로 신출귀몰한 노인 인지고...
일 층으로 다시 내려와서 접수대를 찾았다. 이곳은 이 층에 비하면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다만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빨리 접수를 하기 위해 등불의 나방처럼 접수대 앞에 모여 아우성이었다. 나도 그들처럼 한 마리의 나방이 되어 일단 접수대의 몸을 들이대어 봤지만 좀처럼 접수원의 관심을 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접수원에게 말을 건넸다. 이 과정에 질서라든가 선착순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누가 먼저 접수원의 마음을 훔치는냐(?)가 관건이었을 뿐이다.
어렵게 접수원의 관심을 끌고난 후 예의 A4용지를 보여주었다. 나는 만 점 받은 시험지를 손에 쥔 아이처럼 자신만만했다.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직원과 신출귀몰한 할아버지의 안내에 따라 이곳에 왔다. 당연히 어떠한 문제도 있을리가 없다. 근데 대체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전개지? 접수원은 금붕어 같은 뚱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를 도와줄 수 없어. 이 쪽지를 갖고 이 층 접수대로 가 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 층으로 가니까 일 층으로 가라고 하고 일 층으로 오니까 다시 이 층으로 가라고 하고. 이 빌어먹을 병원은 대체 어떻게 돌아가기에 이따구지? 안 되면 안 된다고 말을 해주던가. 납득할 만한 설명을 줘야 할 거 아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현관 앞에서 발만 동동 굴리며 서 있었다. 그러자 또다시 기적처럼 예의 비상한 노인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무슨 '메리 포핀스'나 '램프의 요정, 지니'도 아닌데 내가 필요할 때 필요한 장소에 마법처럼 나타나다니. 참으로 신출귀몰한 노인인지고...
"접수 잘했어?"
"아니요. 접수 못 했어요. 물어보니까 이 쪽지를 주면서 이 층으로 가서 접수하라고 하던데요?"
"뭐라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믿을 수 없는 악력으로 내 손을 잡더니 계단을 두 칸씩 뛰어넘어 이 층 접수대로 돌진했다. 그러고는 줄 서서 자기 차례를 지루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을 완벽하게 무시한 채 접수대 앞으로 다짜고짜 몸을 들이댔다. 노인은 일 층 접수대에서 받은 쪽지를 보여주면서 내 상황을 재차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상황은 원활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접수원과 노인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더니 급기야 호랑이와 곰처럼 당장이라도 서로를 잡아 먹을 거 같은 상황으로 치달았다. 곧이어 일어난 일은 이런 초긴장 상태에 쐐기를 박아버렸다.
접수원은 쪽지를 낚아채 가더니 그걸 노인 앞에서 보란 듯이 꼬깃꼬깃 구긴 다음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렸다. 노인은 접수원의 돌발적인 행동을 보고 완전히 꼭지가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는 무서운 얼굴로 접수원을 향해 건물이 흔들릴 정도로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접수원도 이에 질세라 더 무서운 얼굴로 더 큰 소리를 친다.
'아이고. 할아버지. 괜히 나 때문에 이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나는 노인뿐만이 아니라 접수원에게도 미안하고 송구스러운 마음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차마 나를 도와주고 있는 이 노인을 말릴 수도 없었고 말이 안 통하는 접수원에게 미안하단 마음을 표현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무기력할 수가 있나... 언어가 안 통한다는 건 이런 거다. 상황에 따라서는 마누라 등만 바라보고 사는 백수 아저씨보다 더 한심해지고 일곱 살 어린아이보다 더 무기력해진다.'
다행히도 노인과 접수원의 말싸움은 머지않아 진정이 되었다. 노인은 나를 데리고 다시 어디론가 향했다. 같은 건물 일 층의 구석에 위치한 작은 사무실이었다. 노크를 한 후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곳에는 흰색 가운을 입은 3~4명의 여성들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바퀴벌레만큼이나 쓸모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구석탱이에 가서 앉았다. 노인은 흰색 가운의 여성들에게 침을 튀겨가며 열심히 상황 설명을 했고 나는 그를 멀뚱멀뚱 쳐다만 보았다. 흰색 가운을 입은 여성들은 노인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가끔씩 나를 힐끔힐끔 보았다. 그들의 눈빛과 표정에는 작은 호기심과 연민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고마움과 함께 왠지 모를 죄책감과 송구함 또한 느꼈다.
한바탕 연설을 마친 노인은 나를 데리고 사무실을 나와 다시 이 층으로 향했다. 그는 접수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나를 의사의 진료실 앞에 데리고 가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진료실 문이 열리면 잽싸게 들어가서 상황 설명을 해. 나는 볼 일이 있어서 잠깐 어디 갔다 올 테니까."
'!?!?!?!?' 그렇게 노인은 떠나갔고 나는 의사의 진료실 앞에 홀로 남겨졌다. 감옥처럼 굳게 닫힌 진료실 문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진료실 문 왼쪽 상단의 전광판에는 순서를 알리는 번호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 숫자를 보고 판단하건대 기다리는 사람이 족히 열 명은 넘는 거 같았다.
'아니, 할아버지. 차라리 나를 사막 한가운데 두고 가시지 왜 이런 곳에 두고 가시나요? 흑흑흑. 그건 그렇고 대체 이 많은 사람들을 제쳐두고 어떻게 진료실 안으로 몰래 들어가지?'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진료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20분 가까이 흘렀지만 안에서 미동은커녕 어떠한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안에서부터 열릴 줄 알았던 문은 예상과는 달리 밖에서 열리게 되었다. 어디선가 흰 가운을 입은 여(女)의사가 나타나더니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간 것이다. 이 장면은 내게 꽤나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스스로 진료실 문을 따고 들어간다고? 그러고 보니 가까이에 의사를 보조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안타깝게도 의사가 너무 예기치 않게 나타났기에 나는 자기 차례가 온 환자와 함께 안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갈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그 투박하고 거대한 진료실 문은 내 눈앞에서 굳게 닫혔고 나는 다시 문이 열리기까지 15분가량을 더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진료실 문이 다시 열리고 나는 카프탄 코트를 입고 히잡을 두른 풍채 좋은 아주머니의 그림자에 숨어 안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진료실은 굉장히 초라했다. 의사가 앉아 있는 책상과 환자를 진료하는 침상이 한쪽 구석에 놓여있고 다른 한 쪽 구석에는 싸구려 철제 의자 몇 쌍이 놓여 있을 뿐이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그건 양해라기보다는 손짓과 발짓을 이용한 처절하고 절박한 몸부림이었다.) 의사 앞으로 다가갔다.
의사의 표정은 상당히 어두웠다. 이제 막 정오가 지난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매우 피곤한 모습이었다. '하긴 누구 한 명 자기를 보조해 주는 사람 없이 하루에 수십 명이나 되는 환자들을 상대하려면 몸도 마음도 지치는 게 당연하겠지.' 그런 의사를 보면서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한 줌의 희망을 좇아 어렵사리 여기까지 왔지만 결국에는 일이 잘 안 풀릴 거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잠시 A4용지에 적힌 메모와 한국에서 처방받은 영문 진단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아니나 다를까 내가 이 건물에서 만났던 다른 모든 병원 관계자처럼 고개를 오른쪽으로 15도 정도 갸우뚱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미안한데 나는 너를 도와줄 수 없어.'
이 세상에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유일하게 나를 도와주었던 노인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의 신출귀몰함도 이 밀실 안에서는 그 힘을 잃었다. 마음 속에서 포기와 체념이 자라났다.
여의사는 고개를 연신 절레절레 흔들기만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불과 일 분 전보다도 더욱 피곤해 보였다. 내 등 뒤로는 나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켜준 아주머니가 온화한 표정을 지은 채 차분하게 서 있었다. 그녀 또한 이 복잡하고 칙칙한 병원에서 오랫 동안 자기 차례를 끈기 있게 기다렸을 것이다. 이 이상 무리하게 시간을 지체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나는 의사와 아주머니에게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발걸음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완전히 돌아섰다. 여기서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실망스러운 결과에도 불구하고 병원을 나서는 내 발걸음은 매우 가벼웠다. '처방전 없이 약을 어떻게 찾지?'라는 걱정보다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병원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기쁨이 앞섰다. 떠나기 전 나를 도와주었던 노인에게 제대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오후 시간을 맞이한 병원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승용차와 택시, 구급차 등이 사방에서 빵빵대며 제 갈 길을 서둘렀고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목적지를 찾아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원의 정문을 나온 순간 마법처럼 주변이 고요해졌다. 파란 하늘과 밝은 햇살이 내 눈을 비췄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시도는 해 보았잖아. 이걸로 된 거야.'라고 생각하며 나는 한적한 주택가를 지나 집으로 향했다.
여담이지만 터키 사람들의 친절함과 행정의 허술함(?) 덕분에 약을 찾을 수 있었다. 잘 설명할 순 없지만 그 과정에서 병원에 방문했던 게 어떠한 식으로든 도움이 된 거 같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나는 누워서 로또에 당첨되기만을 바라는 사람만큼은 절대 되지 않을 거다. 되든 안 되든 일단 몸부림은 쳐야 되지 않겠어? 특히 그게 옳은 일이라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