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길바닥에서 남자 친구 R과 싸우고 있었다. 싸움은 R이 볼멘소리를 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야. 너는 내가 집에 데려다주는 게 당연하냐?”
“이게 뭔 소리지?”
“내 친구 여자 친구는 지가 남자 친구 집 데려다 주기도 한다더라. 얼마나 착하냐?”
하. 나는 들으라는 듯 코웃음을 치고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R을 노려봤다. R은 내가 화를 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뭘 또 정색을 해.”
“야. 집에 데려다주는 여자 친구 사귀고 싶으면 그런 애 찾아서 만나. 왜 대부분의 커플이 남자 친구가 여자 친구 데려다주는지 너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지? 밤거리에 위험한 건 여자지 남자가 아니야. 너보다 내가 훨씬 위험에 처할 확률이 높아서 니가 날 데려다주고 있는 거라고. 알아? 야! 나도 여자 친구 만날 때는 내가 데려다 주기도 했어! 근데 네가 여자냐? 너 남자잖아!”
R은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을 들으며 벙찐 채 서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실컷 말을 쏟아낸 뒤에도 분이 덜 풀린 나는 한참을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R은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R을 앞에 두고 혼자서도 술을 열심히 마셨다. R이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줘야 하는 날이 잦았다. R과 나의 집은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이 넘는 거리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두 번씩 나를 데려다주고 막차를 타는 건 꽤 피곤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R의 불만이 어떤 맥락에서 나오게 된 건지는, 이해하고 있다는 소리다. 다만 R이 술을 줄이라는 잔소리를 한 게 아니라, 자기도 집에 데려다 달라는 투정 같은 걸 부린 게 나의 어떤 분노 포인트를 눌러버렸던 것 같다. R이 자신을 집에 데려다 달라는 투정을 부리던 순간, ‘동상이몽’,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같은 말들이 떠올랐다. R은 나와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구나.
집에 바래다주는 행위. 그건 내가 쏟아냈던 말처럼 안전을 위한 행위이기도 하지만 실은 상대를 걱정한다는 애정 표현이기도 하다는 걸 알고 있다. 혹은 더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한 핑계라는 것도. 그걸 알고 있음에도 R에게 거칠게 쏘아붙였던 이유가 뭘까. 그건 밤거리에서 곤경에 처했던 과거의 ‘나’들이 토한 울분일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한다.
택시 어플이 상용화되기 전에, 친구들과 술을 먹고 헤어지는 새벽이면 우리는 대로변 앞에서 항상 분주했다. 우선은 집이 가장 먼 친구부터 빠르게 택시에 태웠다. 내가 뒷좌석에 친구를 밀어 넣고 있으면 뒤에서 다른 친구는 “조심히 가!”라고 연신 외치고, 또 다른 친구는 조수석 창문을 통해 기사님께 잘 부탁드린다며 고개를 꾸벅이는 식이었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작별인사와 함께 택시가 떠나면, 단톡방에서 요란한 이별의 2막이 시작됐다. 너나 할 것 없이 촬영한 택시 번호판을 단톡에 공유하고, 집에 도착하면 메시지를 남기라고 재촉하는 식이었다. 어디서 다 같이 배운 것도 아닌데, 우리는 서로를 유난스러울 만큼 걱정했다.
한번은 홍대에서 모르는 여자들과 술을 마셨다.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그날 시간이 되는 사람들이 모인 번개 모임이었다. 한참 술을 마시다 보니 화장실에 가고 싶어 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나를 보고 어떤 여자가 말했다.
“어, 여기 화장실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아 진짜요? 나갔다 와야겠네.”
“같이 가요.”
초등학생 같네. 혼자 생각하면서 나는 그 여자와 같이 화장실에 갔다. 여자의 경고대로 화장실은 꽤나 으슥한 곳에 있었다. 좀 무섭네…. 후다닥 일을 보고 다시 밖으로 나왔는데, 따라 나온 여자는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 가요?”
화장실을 가리키며 물었다. 내 말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왜 따라 나온 거지? 나는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여자는 술집으로 걸음을 옮기며,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세상이 무서우니까.”
“아….”
우리는 더 대화를 나누지 않고 말없이 걸었다. 그해 봄에는 어떤 여자가 강남역의 한 술집 화장실에서 살해당했다.
그러니까 술 먹고 돌아다니지 마.
그러면 될까?
짧게 연애했던 여자 친구가 있다. 자정이 되어서야 퇴근하는 사람이었다. 그 애의 회사 근처 골목에서 숨어 있다가, 걔네 집까지 자주 같이 걸어가고는 했다. 지름길로 가려면 번화가를 통과해야 했는데, 시끄러워서 보통은 한적한 길로 돌아서 가고는 했다. 그런데 하루는 여자 친구가 많이 피곤해했고, 번화가를 통과해서 얼른 집에 가기로 했다.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데, 어떤 남자들이 우리를 가로막았다. 우리는 손을 꽉 쥐고 남자들을 경계했다. 남자들 중 하나가 빙글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둘이 놀아요? 같이 놀면 어때요?”
우리는 일제히 굳은 얼굴로 남자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싸가지 없는…. 야야, 냅둬. 남자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뒤통수에 와 붙었다. 여자 친구는 빠른 속도로 걷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일찍 일찍 다녀. 밤에 다니지 말고.
정말 그러면 될까?
‘그런 일’은 시간을 가리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였다. 주말이고 낮이었다. 잠깐 서점을 가기 위해 혼자 집 밖으로 나섰다. 집에서 나온 지 1분도 되지 않았을 때, 뒤에서 누군가 나를 거세게 잡아챘다.
“저기요. 이상형이라서 그런데 번호 좀 주세요.”
“네? 싫어요.”
나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런데 남자는 더 억세게 내 팔목을 잡고 놓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패닉 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상형이라고요! 번호 좀 달라니까요!”
남자는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서도 꽉 그러쥔 내 손목을 놓지 않았다. 아니 싫어요. 싫다니까요. 악이라도 써야 사람들이 몰려와 도와줄 것 같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몸부림친 끝에 나는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신없이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를 듣자마자 현관에 주저앉았다. 엄마가 무슨 일이냐고 동그란 눈으로 물었다. 손목이 기억하는 불쾌한 촉감은 오랫동안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다음 날부터 한동안 남동생은 동네에서도 나와 동행했다. 편의점에도 같이 가고, 걸어서 5분 거리인 삼촌 집에도 같이 가고,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줬다.
이 모든 일을 겪은 후에 나는 R을 만났다. 이제와 고백하자면, 나는 R이라는 사람을 좋아했다기보다는 그와 걸으면 낯선 남자가 위협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우리의 귀갓길이, ‘안전’과 ‘귀가’를 연결해 본 적 없는 그들의 귀갓길만큼 무탈해졌으면 좋겠다. 낮에 돌아다니든, 밤에 돌아다니든, 술을 먹었든 먹지 않았든. 버스 정류장까지, 외부 화장실까지, 집까지 가는 길에 그 어떤 두려움이 없을 수 있다면. 기분 좋게 취한 상태로 신선한 밤공기를 누리며 걸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정말 좋겠다.
그러니까 우리를 위협하지 마.
그러면 되는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