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째) 금주(禁酒) 일기
나의 금주(禁酒) 일기 - 18일째
( opening )
첫번째편. 우연과 필연
두번째편. 아버지와 바다
세번째편. 우물 안 개구리
네번째편. 속력과 균형
다섯번째. 소나기와 빗소리
여섯번째. 자연과 인간, 문학
지금까지 이렇게 6편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건 오히려 허구의 세계인 소설, 드라마, 영화, 연극 등이 더 우리에게 적합한 것일 수 있습니다. . .그래도 문학과 예술, 술 같은 벗이 제 옆에 오래오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여기까지가 저번 이야기입니다.
. . . . ( 오프닝 끝 )
오늘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언젠가 책을 읽다가 김훈 작가와 한강 작가 두분 다
‘숲’ 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중국은 표의 문자이고, 우리 글은 표음문자입니다. 표의 문자는 글자 하나하나가 특정 의미를 나타내는 문자이고, 표음 문자는 글자 하나하나가 일정한 소리를 나타내는 문자입니다.
표음문자의 민족답게 두 작가님 모두 음 (音) , 즉 소리가 좋아서 ‘숲’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는 걸 작품 속에서 알게 되었는데, 신기하기도 하고 해서 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어떤 단어를 좋아하는지? 입에서 나오는 어떤 소리를 좋아하는지? …..
제가 좋아하는 단어는 뒤에 소개하기로 하고 우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신 한강 작가님의 소설 속 문장을 옮겨 봅니다.
언젠가 숲이라는 소재로 이런 글을 쓰려고 이 문장들을 고이 저장해 놓았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가 되었나 봅니다.
( 소설. . 희랍어 시간 - 한강 )
‘ 그 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 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 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
. . .
다음으로는 남한산성, 칼의 노래의 작가 김훈 님의 여러 책에서 언급되는데 그 문장을 옮겨봅니다.
(에세이 ‘자전거 여행’중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 김훈)
‘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자음 'ㅅ'의 날카로움과 'ㅍ'의 서늘함이 목젖의 안쪽을 통과해 나오는 'ㅜ' 모음의 깊이와 부딪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바람이다. 'ㅅ'과 'ㅍ'은 바람의 잠재태다.
이것이 모음에 실리면 숲 속에서는 바람이 일어나는데, 이때 'ㅅ'의 날카로움은 부드러워지고 'ㅍ'의 서늘함은 'ㅜ' 모음 쪽으로 끌리면서 깊은 울림을 울린다.
….
그래서 '숲'은 늘 맑고 깊다. 숲 속에 이는 바람은 모국어 'ㅜ' 모음의 바람이다. 그 바람은 'ㅜ' 모음의 울림처럼, 사람 몸과 마음의 깊은 안쪽을 깨우고 또 재운다.
…..,
저는 소리 내 볼수록 숨소리처럼 숲이 들리기도 하고, 숲이라는 단어로 이런 깊은 사유를 하는 작가들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제가 좋아하는 단어를 소개하겠습니다. 저도 한국사람인지라 발음하기 좋은 단어를 좋아하나 봅니다.
어렸을 적 교과서에서 읽었던 이상보 님의 수필 ‘ 갑사 (甲寺)로 가는길’ 에 나온 ‘시나브로’ 라는 단어의 음과 뜻에 매료되었습니다. 우선 받침이 없어 부드럽고 음과 뜻이 어떻게 이렇게 절묘하게 어울릴까 생각했습니다.
'시나브로'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의미입니다.
‘갑사로 가는 길 ‘ 은 짧은 수필이지만 동학사와 남매탑에 얽힌 설화와 산세의 멋과 인간의 마음을 잘 표현해서 제 마음도 시나브로 빠져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수필 속 그 문장을 옮겨봅니다.
. . .
그리고 ‘저는 ‘아스라이’ 라는 단어도 좋아합니다. 역시 소리가 좋고 뜻도 좋은 데다 문학 속 어느 장면에 가끔 등장하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통상적으로 흐릿하고 희미해져 가는 느낌을 표현하는데 문학에서는 잡을 수 없고 이룰 수 없는 꿈같은 상황에서 애달픈 마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리고 영어에서는 ‘아이러니’ 라는 단어가 발음이 예뻐서 좋아합니다. 단어 뜻도 좀 심오하구요.
아이러니의 사전적 의미는 일이나 상황에서 예상 밖의 결과로 인해 발생하는 모순이나 부조화를 이야기합니다. 문학이나 연극, 영화에서는 겉과 속이 다른 상황을 표현하는 기법으로도 활용됩니다. 아이러니한 상황 연출 같은 거 많이 보셨을 겁니다.
프랑스어에서는 ‘똘레랑스’ 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프랑스어를 많이 알지 못하지만 앞에 소개한 단어들처럼 발음이 좋고, 특히 이 단어는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경쾌한 느낌입니다. 홍세화 님이 쓰신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 라는 책에서 이 단어를 처음 접했고, 번역하기에 딱 맞는 단어는 없는데 굳이 해석하자면 ‘관용’ 이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일본어에서는 ‘코모레비 (木漏れ日, こもれび) ‘ 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작년에 일본어 선생님이 자신이 좋아하는 단어라고 알려주고 선물로 그 글이 써진 가죽 책갈피를 주었기 때문에 안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코모레비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 이라는 감성적이며 아름다운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 긴 문장이 네 글자로 표현이 되다니 신기하기도 합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찍은 사진)
그리고 코모레비 이 단어도 역시 받침이 없는 걸 보니 제가 부드러운 발음소리를 좋아하는 게 맞나 봅니다. 좋아하게 된 또 다른 이유도 있는데 작년에 본 영화 속에서 이 단어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소설과 영화 속 ‘코모레비’ 는 짧은 순간에만 존재하는 빛으로, 그 순간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인물의 삶과 연결되어 묘사됩니다. 보는 내내 잔잔하게 전개되는데 영화가 끝나면 뭔가가 밀려오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 단어를 모티브로 한 영화 ‘퍼펙트 데이즈 ‘ 소개글 전해드립니다.
‘ 코모레비는 일본 문화 특유의 섬세한 감성을 담은 단어이며, 영화 퍼펙트 데이즈 등을 통해 한국에도 알려지면서 작가들이 독자의 일상에 녹아든 순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소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금주 (禁酒)를 시작한 지 언제인지 기억도 아스라이 멀어져 가고 이제는 술맛도 가물가물 하거니와, 아이러니 하게도 시작할 때는 거창했는데 제대로 쓴 것없이, 시나브로 오늘 글을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라이딩 출퇴근 하는 길에 숲에서 만나는 코모레비를 보면 순간에 충실하자는 생각을 하며 반갑게 나뭇잎 사이 햇살에게 인사를 건네렵니다.
저에게 똘레랑스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