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늦은 금주(禁酒)의 계절

(37일째) 금주(禁酒) 일기

by 하늬바람


나의 금주(禁酒) 일기 -37일째


- 때늦은 금주(禁酒)의 계절 -


(opening)

저번 편 나의 금주(禁酒) 일기 32일째는 ‘그래도 9월이다’ 였습니다.


‘매일 똑같지 않기를 바라는 그 시간들이 내 어깨 기대고서 살며시 잠이 든 널 보고 질투하나 봐’ ‘그래도 9월이다.’
변화를 맞이해야 할 시간. 9월입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힘을 얻는 건 바로 이런 변화였던 것 같습니다. 독서든, 여행이든. 음주나 금주든..

(opening 끝)


오늘은 여기부터입니다.



귀뚜라미

- 詩 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 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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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유난히도 지루하고 긴 무더위도 지나가고 어느새 선선한 가을바람이 코끝을 스칩니다. 아침 출근길이 선선해져서 옷도 한 겹 더 입게됩니다.

이 시는 노래로 민들어져 유명한 시(詩)인데, 원작은 나희덕 시인의 시입니다. 자세히 음미하며 읽어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게 만듭니다.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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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구절은 여름철 매미 떼의 울음에 묻혀서 들리지 않는 귀뚜라미의 울음에 빗대어 존재감 없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 가는 가을이 오고 그때에는 나의 노래도 누군가의 가슴에 가 닿을 수 있길 기대하는 마음을 엿보여 주기에 멋진 시가 완성됩니다.


물론 시의 해석은 내 멋대로 자의적입니다.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시에 대한 해석과 감상의 자유가 좋은 이유는 시는 자기 것으로 전유될 때 오독조차 생기를 얻기 때문이랍니다.

이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름이 매미의 시절이라면 가을은 귀뚜라미의 철입니다.

나의 계절, 나의 시기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여행가 한비야 님의 책에서 읽었던 비슷한 내용의 글이 떠올라 인터넷을 열심히 뒤져 여기에 옮겨봅니다..

( 한비야 에세이집. 중국견문록)


"가을에 피는 국화는 첫 봄의 상징으로 사랑받는 개나리를 시샘하지 않는다.

역시 봄에 피는 복숭아꽃이나 벚꽃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한여름 붉은 장미가 필 때, 나는 왜 이렇게 다른 꽃보다 늦게 피나 한탄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준비하며 내공을 쌓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매미소리 그치고 하늘이 높아지는 가을, 드디어 자기 차례가 돌아온 지금, 국화는 오랫동안 준비해 온 그 은은한 향기와 자태를 마음껏 뽐내는 것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늦깎이라는 말은 없다. 아무도 국화를 보고 늦깎이 꽃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처졌다고 생각되는 것은 우리의 속도와 시간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고, 내공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직 우리 차례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철에 피는 꽃을 보라! 개나리는 봄에 피고 국화는 가을에 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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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밤이 되면 풀벌레 소리가 가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길가에도 나뭇잎 색채가 조금씩 물들어가며, 계절은 이렇게 정직하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저도 늦기 전에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손 놓고 있던 일들을 금주(禁酒)와 함께 시작해 봅니다.

다시 돌아올 음주의 날은 그동안의 금주로 인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어쨌든 지금은 저에게 때늦은 금주(禁酒)의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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