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선물처럼 나타난 날

종영된 라디오 코너, 장대라의 '주첵이야'

by Fairest isle



살다 보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추억이 선물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2019년으로 돌아가 보자.


휴직을 하고, 베트남 주재원 와이프로서의 삶을 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나는 친구가 없어 무척 심심했다. 그래서 이미 종영된지도 한참 지난 추억의 라디오 방송 <장기하의 대단한 라디오>의 인기 코너인 “주첵이야”를 팟캐스트에서 찾아 다시 정주행 하기로 했다.


사전에 제시된 '주제'를 '체크'한 뒤 그에 맞는 사연을 소개하는 "주첵이야'는 2013년 전후에 방송되었던 코너였다. DJ 장기하도, 게스트 페퍼톤스도 입담도 좋고 케미도 잘 맞아서 무척이나 애정 했더랬지.


2019년이 저물어가던 어느 날, 나는 여느 날처럼 물티슈로 커피 머신을 닦으며 2013년도에 방송된 '주첵이야'를 듣고 있었다. 그때, 페퍼톤스 멤버 이장원이 내 남편과 이름이 같은 신청자의 사연을 소개하는 것이 아닌가. 흔하지 않은 이름이었기에 신기해서 더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 사연은 들으면 들을수록 방송 당시 여섯 살이었던 내 딸 J의 이야기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내용인즉슨,

당시 6살이던 딸은 신생아 때부터 베고 자던 소 모양의 베개를 아직까지 애착 인형처럼 꼭 안고 다닌다. 그 베개 인형의 이름은 “음머”이며 심지어 일본 여행에서도 들고 다닐 정도이다. 이제 6살이 된 음머는 꼬질꼬질하지만, 딸이 너무나 소중히 여겨 차마 버릴 수 없다..

뭐 이런 사연이었다. 신재평은 나중에 커서도 그 인형을 계속 간직할 것 같다고 말했다.

억을 더듬어보니, 당시 컴퓨터에 SBS 라디오 플레이어가 남편 이름으로 가입되어 있었고 나는 남편 이름으로 이런저런 신청곡이나 사연을 보냈던 것 같았다.

당시 이 사연을 보내 놓고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사연 소개를 들어놓고서도 살면서 잊어버린 것인지 모르겠다.


중요한 점은, 내 딸의 깜찍한 라디오 사연을, 2013년 방송된 줄도 모르고 2019년까지 지내다가 그야말로 우연히 다시 듣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내 기억 속에서 삭제되었던 추억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시 배달 온 놀라움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휴직하고 하노이에 오지 않았으면, "주첵이야"가 아닌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를 들었다면 모르고 넘어갔을 일이 아닌가.

정작 그 사연의 주인공은 우리였는데.





J와 나이가 같은 음머


2021년인 지금.

신재평 씨의 말대로 그 베개 인형은 지금껏 남아있다.

더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리폼한 J의 낡은 티셔츠를 두르고. 지금은 J의 우선순위에 밀려 침대 구석에 서글프게 널브러져 있다.


예전에는 버리고 싶어도 J가 거부해서 못 버렸지만, 지금은 내가 못 버리겠다.


잘 때도 여행 갈 때도 음머를 꼭 붙들고 있던 그 시절의 J는 그야말로 엄마 껌딱지였다.

내가 화장실 갈 때도, 샤워할 때도,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갈 때도 나를 졸졸 따라다니고, 자다가도 내가 옆에 없으면 나를 찾던, 엄마 껌딱지 J.

그 시절이 그토록 그리워질 줄이야.


“내 방에서 나가”라는 말이, 엄마인 내게 하는 말의 대부분인 딸아이 J의 히스테리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오늘도 빌 브라이슨의 책과, 핸드폰과, 노트와 갤럭시 버즈 이어폰을 챙겨 들고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카페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며, 잃어버린 지난날을 그리워하며 쓰디쓴 베트남 커피 사발을 연신 들이키다 마음이 쓰린 건지 위가 쓰린 건지 분간이 안되는 뱃살을 웅켜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J는 이제 내가 집에 없으면 좋고, 내가 자기 방에 들어오는 게 싫은 아이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14살의 나 역시 그러했다마는... )


내 품에 항상 안겨 있으려던 아기 J가 그리워지는 날에는, 낡아서 해어진 꼬질꼬질한 음머를 꼬옥 안아본다.

일하는 엄마가 보고 싶은 아기가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엄마 대신 음머를 꼬옥 안으며 느꼈을, 그 감촉을 나도 느껴본다.

포근하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조금은 쓸쓸하다.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엄마 껌딱지 J.

앞으로 점점 나를 떠나가는 일만 남았지.

이렇게 같은 집에 함께 살고 있는 지금을 그리워할 날도 오겠지.

그때 후회하지 않게, 지금 상처 받지 말고 더 사랑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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