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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호 May 19. 2023

우리 집 남경이

낮 간지러운 사랑 얘기를 글로 조심스레 옮기다

우산도, 양산도 필요 없는 화창한 어느 봄날 색 바랜 점퍼차림의 나는 어느 한 병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무슨 이유인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깔깔 웃음을 보이는 그녀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원장님의 전략적인 계획으로 정작 당사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분홍색 가운과 긴 머리, 그리고 청순한 얼굴에 확 끌려버린 나.

     

그 순간부터 나의 작전은 시작이 되었다. 아니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아제 개그지만 그녀는 연신 웃어주었고 병원이 아닌 외부에서의 만남을 어렵사리 성사시켰다.

     

전화가 기다려지고, 주말이 기다려지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진대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껴버린 순간.     

이젠 동행의 수순을 밟기로 결심을 한다. 손 편지와 세치의 혀 놀림은 훌륭한 도구가 되었고, 모든 것을 웃음 하나로 표현해 버리는 그녀에게 반한 걸까? 속은 걸까? 아니면 하늘이 맺어준 인연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을까?

     

우스워도 웃고, 미안해도 웃고, 당황해도 웃고, 황당해도 웃는 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박봉의 말단 공무원 봉급과 깡마른 체구, 집안에서는 장남이라는 어느 하나 조건이 좋은 것 없는 이력을 들고 지금의 장모님을 만난 건 폭탄을 품에 안고 불에 뛰어드는 느낌이었지만 예상하였던 돌 직구와 주위의 따가운 눈총은 오직 그녀의 마음을 빼앗아버리는 수밖에는 달리 해결책이 없었다.


<< Before >>

     

어려운 과정을 거쳐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맞이할 때 나는 세상을 다 가졌고, 달콤한 신혼에서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하였던 세상의 아름다움은 짙은 색감으로 내게 다가왔다.

     

경직된 단속업무를 내던져버리고 수도권으로 연구원 배지를 달고 올 때 경제적 어려움은 삶에서 하나의 주춧돌이 되었고 오히려 서로를 더욱 깊이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흔히들 나이 들면 아내, 와이프, 애 엄마 밖에는 없다고 하지만 이건 나에게서 순전히 틀린 말이었다. 아내, 와이프, 애 엄마, 집사람, 동반자, 부인, 안사람, 처, 귀부인, 사모님....  이 정도의 단어는 구사를 하여야 직성이 풀리는 것은 왜일까?

     

아내자랑, 자식자랑은 팔불출이나 하는 것이라지만 그래, 나는 팔불출을 지나 구불출, 십불출, 백불출의 소리를 들어도 좋다.

     

남들은 이 나이면 다들 각방을 쓴다고들 하는데 나에게선 어림없는 말이요, 그녀의 코골이도, 방귀소리도 예쁘게 들린다. 정말 그러고 보니 내가 팔불출이 맞긴 맞나 보다.

     

그녀를 만난 지 30년이 훌쩍 지났다. 부자는 아니지만 멋진 30주년 결혼기념일을 내가 그리도 좋아하는 비엔나에서 오페라공연을 보고, 예술적 향기가 묻어나는 아름다운 호텔에서 맛난 저녁을 즐기려 하였으나 코로나라는 복병이 찾아와 계획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렸고, 이 시간의 매움은 딸과 사위, 아들 녀석이 채워주었다.     

특별히 시간이 지나 달라진 것은 없어나 딸 녀석을 시집보낸 후 끊어버린 염색약과 매년 정확하게 2.1 데시벨씩 높아지는 목소리의 강도는 오히려 아름답게 나이 드는 증표가 아닐까?

     

지금도 우리 집 남경 씨는 잘 웃는다. 우스워도 웃고, 미안해도 웃고, 수줍어도 웃고, 황당해도 웃는다. 이 웃음 트렌드는 외출 시 화장실을 갈 때 외에는 잠시라도 헤어지는 것을 철저히 배격하는 무기가 되었고, 그 엄청난 무기가 현재 사는 아파트의 등기권리증과 자동차의 차량등록증에 자기의 이름을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참 고수 중의 고수이다. 나는 이런 남경 씨가 아직도 참 좋다. 이혼법정이 뭐 하는 곳이며, 등 돌린다는 단어를 전혀 모르게 해 주었고, 성격이 다름은 오히려 서로를 보완해 주는 촉매제로만 알게 하였다.

     

퇴직을 하고도 다시 일을 할 수 있음도, 이렇게 여유롭게 글을 쓸 수 있음도, 쇼핑을 나갈 때 손을 꼭 잡고 나설 수 있음도 다 남경 씨의 배려가 없인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오늘 저녁에는 듣기 좋은 잔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내가 평생 손을 대지 않던 설거지와 레시피를 유튜브로 배워보라고....

     

언젠가는 어느 구석진 요양원의 침상에서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며 살아온 삶을 정리하게 되겠지. 하지만 나는 남경 씨로 인해 내 인생의 절반, 아니 70%쯤은 그 회상 속에 담길 것이다.


<< After >>

     

더 머리가 굳기 전에, 더 감정이 무디어지기 전에, 비록 체계가 엉망이고 남이 보면 오글거리는 글이라도 남겨본다. 그래야 내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할 것 같다.

     

오늘도 남경 씨의 해맑은 웃음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나는 참으로 행복하고 복 받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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