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균형 잡힌 인재 양성을 위하여
입시의 끝판왕, 의대가 된 사회
한국의 의과대학은 지금 그야말로 ‘입시의 끝판왕’이 되었다. 정부는 2025학년도부터 의대 정원을 기존 3,058명에서 2,000명 증원해 5,058명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으나, 실제 2025학년도에는 1,509명(총 4,567명) 증원이 확정됐다.
또한 2025학년도에만 증원이 이루어진 상태이며, 2026학년도 이후 추가 증원은 아직 향방이 묘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대에 대한 수험생들의 열기는 더 뜨겁다. 일부 대학은 99점대 백분위라는 사실상 만점 수준의 성적을 요구하고 있으며, 경쟁률은 오히려 상승하고 있다.
이제 의과대학은 단순한 진로 선택지가 아니라, 경제적 안정성과 사회적 명예를 동시에 상징하는 목표로 자리 잡았다. 국내 의사(전문의) 평균 연봉은 최근 통계 기준 3억 원을 넘으며, 일부 인기 진료과(안과 등)는 6억 원대에 이르고, 대학병원 전임의·교수 등은 1억 5,000만~2억 원, 개원의는 2억~2억 5,000만 원대가 일반적이다.
반면 대기업 이공계 신입사원 연봉은 5,000만~7,000만 원 수준이며, 중소기업·공공기관은 3,600만~4,000만 원대이다. 이런 현실 앞에서, 상위권 학생들이 의대로 몰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선택처럼 보인다.
다양성을 잃은 진로 지도
이러한 쏠림 현상은 우리 사회의 인재 양성 구조를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다. 수학과 과학에 재능을 보인 많은 학생들이 오직 의대 입학이라는 목표를 위해 교육과 진로를 설계하며, 그 과정에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형태의 창의적·융합적 인재는 설 자리를 잃는다.
문제는 단순한 직업 선호의 문제를 넘어선다. 필수의료 분야는 인력이 부족한 반면,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일부 진료과로만 의사 인력이 집중되는 현상은 의료 서비스의 공공성과 형평성마저 위협하고 있다. 이는 곧, 의사 수의 절대적 증가가 사회 전반의 건강한 균형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세계는 과학기술 인재 전쟁 중
의대 쏠림은 한국만의 현상이지만, 세계는 지금 과학기술 인재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산업에만 향후 30만 명의 인재가 추가로 필요하다고 전망하고 있으며, 대만 역시 미충원 반도체 인력이 3만~4만 명에 달한다.
한국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한국고용정보원 등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25년 기준 이공계 인력 부족 규모는 연간 약 4만 명 내외로 추정된다. 2028년에는 4만 7,000명까지 부족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으나, 이공계 특수대학의 경쟁률은 최근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하락했다. 이러한 현상 뒤에는 ‘의대 집중’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놓여 있다.
의사 한 명이 늘어나는 것이 단순한 진로의 문제를 넘어서, AI, 반도체, 우주기술, 로봇 등 미래 산업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잠재 인재 한 명이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융합형 인재, 그 새로운 기준
이제는 ‘의사냐, 공학자냐’를 선택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설 때다. 미래는 하나의 전공, 하나의 직업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융합의 시대다. 다양한 분야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인재가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의학과 공학, 생명과 데이터 과학을 함께 공부하는 MD-AI, MD-PhD형 융합형 인재 양성을 과감히 확대해야 한다. 의사이면서 프로그래머, 엔지니어이면서 임상의라는 새로운 인재상은 곧 다가올 시대에 핵심이 될 것이다.
또한 반도체, 우주항법, 의료기기 등 국가 전략산업에 종사하는 과학기술 인력에게도 정당한 보상과 경제적 안정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들이 의사와 동등한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 인식 또한 달라져야 한다.
입시 개혁 없이는 미래도 없다
현재의 문·이과 통합 수능은 사실상 의대 쏠림을 가속화시키는 구조로 작용하고 있다. 공학·기초과학에 특화된 입시 전형을 신설하고, 이공계 인재 양성을 위한 학과 정원 확대 및 장학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중·고등학교에서 진행되는 진로 교육 역시 단순히 고소득 직업을 소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학생들이 다양한 문제 해결 경험을 통해 자신의 적성과 관심 분야를 발견할 수 있도록 변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소년들이 돈이 아닌 사명과 호기심을 따라 진로를 설계할 수 있도록 사회 전체가 건강한 응원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공공의료의 균형도 함께 고민해야
의대 정원 확대가 ‘성형외과·피부과 의사’만 양산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분야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지역에서 일하는 의사에게는 장학금, 수가 인상, 안정적 커리어 보장 등 실질적인 유인을 제공해야 하며, 그 부담은 개인이 아닌 국가가 함께 나누어야 한다.
의사가 되는 일이 개인의 성공만이 아닌 사회적 책임의 일환이라는 인식이 뿌리내릴 때, 의료의 공공성과 전문성은 비로소 균형을 이루게 될 것이다.
묻는다, 당신의 재능은 어디로 향하는가
지금 한국 사회는 초고령화, 저출산, 기술패권 경쟁,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다중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의대 쏠림 현상은 단순한 직업 선호를 넘어, 사회 전반이 균형을 잃고 있다는 경고로 읽혀야 한다.
의사 수의 증가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모든 재능이 오직 하나의 길로만 몰리는 지금의 현실이 더 큰 문제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돈이 아니라 사명과 호기심으로, 어디에 나의 재능을 쓸 것인가?”
이 질문에 ‘AI와 과학기술’, ‘필수의료’, ‘공공성’이라 답할 수 있는 젊은이가 많아질 때, 한국 사회는 보다 단단하고 균형 잡힌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